사막에선 불타오르는 질문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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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선 불타오르는 질문만 남아 있다
  • 마크 H. 엘리스
  • 승인 2021.05.1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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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보낸 1년-2월 15일

2월 15일

사막은 우리 뒤에서 항상 삭막하고 황량하게 있으며,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항상 조용하게 다가온다. 사막에 있으면 우리는 방랑자가 된다. 만일 축복을 받았다면, 순례자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집이 없고 오직 유목민만이 있을 따름이다. 사막에 오는 많은 사람들은 강제로 벗겨지고 그 뜨거운 열 속에 채찍으로 내몰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기꺼이 사막을 찾아온다.

사막에서의 생활을 추천할 까닭이 별로 없다. 오로지 해와 달과 모래만이 친구가 될 뿐이니까. 사막에선 외로움이 삶의 방식이 된다. 사막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계속되는 모래와 열기만 있으며, 오로지 침묵과 영원한 복종만이 요구될 뿐이다. 사막에는 역사가 없다. 이정표도 명예도 없다. 볼 눈도 없으니까. 사막에는 지을 성도 없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부족조차 이방인들이므로 따로 이방인이 없다. 그리고 집이란 순간일 따름이며 텐트에 불과하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아침이 다가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사막은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는 움직임의 자리이다. 무한의 시간과 시간이 없는 세계이다. 사막은 진행과 행동과 의미가 죽어버리고 묻혀진 침묵의 땅이다. 그곳에는 표시가 없고 부자나 수도자들을 위한 묘지가 없다.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린다. 날아가버리고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사막은 모든 인위적인 것들을 삼켜버린다. 순간만이 남을 따름이고 그것도 눈깜짝할 사이에 열기 속에 그리고 죽으려는 욕구 속에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에서 신기루가 태어난다. 우리에게 가능성과, 약속된 평화, 새로움, 쇄신 등을 상기시키면서. 사막은 이 모든 황량함과 더불어, 오아시스를 자라게 만든다. 사막은 갈증을 요구한다. 오아시스는 지하에서 올라오는 물이다. 오아시스는 그늘을 주고 기운을 다시 차리게 해준다. 사막은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온갖 황량함을 만들어낸다. 오아시스는 푸름과 살아있는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서 인간의 눈을 다시 뜨게 만든다. 사막은 온갖 종류의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오아시스는 대답을 주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뿐이다.

오아시스는 주기 때문에 소모될 운명이다. 위안을 주기 때문에 쓰여지고 남용된다. 바로 이런 삶이 오아시스로 하여금 사막과 죽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오아시스는 긴 죽음 속의 짧은 한 순간이다. 다시 한 번 대답은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불타오르는 질문만, 사막만 남을 뿐이다.

 

마크 H. 엘리스 / <피터 모린; 20세기에 살다 간 예언자>의 저자. 엘리스는 미국 텍사스 베일러 대학에서 유다학연구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유다학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그는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쓰고 편집했다. 그의 대표작은 <해방의 유다신학>, <거룩하지 않은 동맹>, <우리시대의 종교와 포악성>, <예언의 미래: 고대 이스라엘 지혜의 재현> 등이 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극우주의의 강력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스라엘의 미래를 팔레스티나와의 평화로운 연대에서 찾고 있다. 최근에는 <불타는 아이들: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유대적 관점>(2014), <추방과 예언: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이미지>(2015)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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