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 천국이라고, 이건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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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천국이라고, 이건 우상숭배
  • 최태선
  • 승인 2021.05.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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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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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그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글쎄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과 어긋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가정을 소홀히 여기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가정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정을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면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는 가정을 부인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가능하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가정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버린 가정은 다시 새로운 가정이 된다. 따라서 버린다는 의미에서 생각하면 긍정이다. 즉, 가정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다시 회복된 가정이 된다는 의미에서는 부정이 된다. 즉, 전혀 다른 새로운 가정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설이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가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가정과 같은 나와 관련된 것들을 위한 아주 명확한 해설이다. 우리는 아무리 가정을 버려도 완전히 버리기가 어렵다. 불가(佛家)야말로 출가의 대명사이다. 승려가 되려면 세상을 떠나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이 세상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시 이 점에서 다르지 않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자기 비움) 역시 불가의 출가와 다르지 않다. 승려가 가정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가정을 떠나야 한다. 이 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냉정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걱정이 되어 찾아온 가족들 앞에서 모진 소리를 하셨다. 가족관계를 부인하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들을 소개하였다. 가족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라. 얼마나 모진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이 혈연의 가족들을 정말 버리셨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당신이 하신 말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를 당신의 가족을 통해 해석해주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앞에서 가정은 일 순위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 앞에 놓을 수 있는 세상사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단 버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아니다. 순서가 정해지는 것일 뿐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라.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예수님은 가족을 버리고 그냥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마지막 자리에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어머니에게 소개하고 그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다. 요한은 마리아를 집에 모시고 공양하였다. 예수님의 일 순위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였다. 그래서 가족을 버렸다. 그러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달림으로 일 순위의 뜻을 성취한 후 예수님은 당신의 가족인 어머니를 챙기셨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이 순서야말로 복음의 가장 절대적인 요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오늘날처럼 가정을 천국으로 이해하는 사고야말로 전형적인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보다 앞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이다.

나는 성서의 이러한 사고가 이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삶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알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우상제조와 판매가 업이었던 집안의 아들이었던 아브라함은 우상을 비웃었다. 그렇게 우상을 비웃으면 우상이 팔리겠는가. 그래서 우상을 사려던 이웃들이 그 사실을 아브라함의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브라함은 치도곤을 치러야 했다. 어릴 때의 아브라함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런 아브라함이 마침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떠난다. 물론 하란은 ‘난나’라는 달의 신을 섬기는 문화적으로 우르와 닮은 곳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한 아브라함의 삶이 평탄할리 만무이다. 그리고 그곳마저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헤매는 삶을 살게 된다. 곳곳에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방해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겁쟁이(기근)가 되고 거짓말쟁이(이집트)가 되고 비겁한 사람(아내를 버린)이 된다. 관계의 파탄(소알 땅에서의 롯)으로 비통해지기도 하고 하느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아들을 인간적인 방식(하갈과 이스마엘)으로 성취하려다 가정의 파탄을 겪기도 한다. 이스마엘이 태어났을 때는 너무도 기쁘고 감사해서 하느님을 완전히 망각한 세월을 무려 17년(성서는 이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을 기록하지 않는다)이나 보내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모리아산의 아케다(결박)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른 새벽에 이삭과 번제에 쓸 장작을 메고 모리아산을 향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으로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아브라함의 가정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러 가면서 자신과 상의는커녕 알리지도 않은 남편을 사라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신을 번제로 바치려던 아버지를 이삭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의 가정은 모리아산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파탄이 났다.

칼뱅은 이런 인생을 산 아브라함을 부자여서 복을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었다. 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은 그 우선순위를 완전히 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지금 우리가 돌아본 것처럼 엉망이었다. 그에게 평안은 없었다. 그의 삶은 우여곡절의 점철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노력을 기억하셨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이 마침내 주어졌다. 나는 그것이 ‘그두라’였다고 생각한다.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아내로 얻었다. 아들을 무려 여섯이나 낳았다. 물론 그때의 아브라함의 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평화 가운데 행복을 누렸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평범한 가정이라는 행복을 누렸다. 그러나 그 행복은 모든 것을 버린 후에 다시 얻은 행복, 다시 말해 하느님이 더해주시는 ‘이 모든 것’이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우리의 가정에 대한 명확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정을 버렸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셨다. 그것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두라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작지만 정말 알찬 선물이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행복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행복을 주신다. 그러나 그냥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살 때, 다시 말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위해 살 때 우리는 모든 풍랑을 겪지만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해주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하느님이 더해주시는 행복이 가득 넘치는 ‘이 모든 것’을 누리게 된다.

가정을 강조하지 말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하느님이 더해주시는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행복한 가정 역시 가지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평범한 가정이 사실은 진정한 우리의 행복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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