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지 마라, 사람을 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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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지 마라, 사람을 살리는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4.27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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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8

그늘

-배문성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있으면
쉴 수 있을 것 같애
서늘한 표정이 편안하게 해줄 것 같애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
천천히 부르는 노래를 알고 있을 것 같애
그 품에 안기면 서늘한 노래 흘러나올 것 같애
내 그늘보다 더 큰 그늘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품에 안기면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애

그늘에 핀 꽃을 봐
서늘하게 내쉬고 있는 숨소리를 들어봐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늘진 표정을 봐
바람진 노래에 귀기울이며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저 상처들을 봐
그 그늘에 쉬고 있는 저 눈물들을 봐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5,1-9)

예수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는 주로 백성들의 신체적 · 사회적 생명을 회복시키는 사건으로 드러난다. 요한복음서 가운데 ‘고관의 아들을 고친 이야기’ (요한 4,43-54) 와 ‘벳자타 못가의 병자를 고친 이야기’ (5,1-18) 는 모두 병자를 신체적으로 회복시킨 이야기지만, 각기 다른 사회적 · 종교적 질병과 싸우고 있는 예수를 보여준다. 먼저 예수님은 갈릴래아 가나에서 한 고관의 아들을 고쳐주었으며 그 결과 그의 온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베짜타 못가에서는 38년 동안 앓고 있던 병자를 고쳐주었건만 그날이 안식일이라 하여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마음먹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누가 정말 질병을 앓고 있는 불쌍한 사람인지 식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갈릴래아의 믿음

요한이 전하고 있듯이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법” (4,44 참조)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갈릴래아로 돌아오시자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크게 환영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것일까. (1)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몰아내시는 장면은 정말 통쾌하기 짝이 없었을 터였다. 아무리 로마 식민지가 되었기로서니 성전에서 돈벌이를 하는 자들이나 이들의 뒷배가 되어주는 성전세력들이나 가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2) 유다 지도자이며 바리사이파였던 니코데모를 여지없이 궁색하게 만들어버린 그분의 말씀에 대단히 감동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분은 예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있는 카나로 가셨던 것이다.

거기서 헤로데 안티파스의 수하(手下)로 있었을 고관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왔다. 그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는 거였다. 아들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 편 네 편을 가릴 만한 정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다짜고짜로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졸랐다. 아들을 고쳐달라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4,48)고 빈정댄다. 내 기적을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느냐는 뜻이겠다. 그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믿음으로 아들은 같은 시각에 살아났으며 그와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정말 갈릴래아는 믿음이 자라는 땅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도 바로 그 땅이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되돌아가신 곳도 갈릴래아였다.

예루살렘의 구원사건

한편 예루살렘에 다시 가셨던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양의 문’ 곁에 있는 벳자타라는 못가에서도 기적을 베풀었다. 이 못가에는 언제나 소경과 절름발이, 중풍병자 등 숱한 병자들이 진을 치고 누워서 구제받기를 기다렸다. 그 중에는 38년이나 앓아 누워 있던 사람이 있었다. “낫기를 원하느냐?” 이는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이었다. 거의 40년 동안 이 사람이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그가 병을 치유받는다면, 그게 그 사람에게는 ‘구원사건’일 터였다. “그러면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5,8) 육체가 멀쩡해지면 세상을 보는 안목도 달라지는 법이고, 사회생활도 가능해지며, 종교적으로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게 되는 게 유다 사회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5,14) 하고 당부하신다. 몸이 성해져도 마음이 악하면 곧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를 보고 유다인들은 분개하였다. 먼저 이 병자가 안식일에 감히 ‘요를 들고 가는 노동’을 함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윽박질렀다. 예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는 증거로 그의 몸을 성하게 해주셨으나 유다인들은 법으로 이 병자를 다시 단죄한다. 그리고 그에게 요를 들고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을 질책한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도 노동이며, 환자로 하여금 노동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또한 허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시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5,17) 그러자 이번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다고 흠을 잡았다. 정말 구제불능이 따로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실제로 유다의 지도자였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끊임없이 꼬투리를 잡으려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으며, 예수님은 유다인들과 너무 다른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그리고 그분에게서 파견받았기에 유다인들의 관행과 부딪쳤다.

안식일과 치유행위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치유행위를 하는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한 독일 신학자의 이야기를 읽어보자.

… 호수의 배 한 척이 조그만 작은 점으로 사라져 갔다. 우리는 안식일 등잔에 불을 붙이고, 축복의 기도를 드린 다음 식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오두막에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가말리엘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 아들이 몇몇 낯선 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고기 잡으러 떠났지! 당신은 안식일에 고기 잡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는 걸 알지 못하오?”

마따디아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들은 고기 잡으러 떠난 게 아니라 미르얌을 봐줄 의사를 데려오기 위해 티베리아로 간 거요. 어느 누구도 안식일 규범을 어기지 않았소.”
다니엘이 항의했다.
“안식일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단 말이오?”
내가 끼여들었다.
“병을 치료할 일이라면 안식일 규범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소?”
“그렇지 않소. 오직 다른 가능성이 없을 때만 그렇단 말이오.”

나는 짜증이 났다. 세포리스에서는 안식일에 의사를 데려온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가말리엘이 신중하게 말했다. “물론 허용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요. 예를 들어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우물에 빠진 경우 그땐 건져도 됩니다.” 다니엘이 반대했다. “내 의견은 달라요. 그 양이 죽지 않고 살아 남는 것을 신이 원한다면 그 경우 그건 결국 살아 남게 될 테니까! 그 양은 일단 안식일 후에 보살펴야 해요.”

한나의 무릎 위에 열에 들뜬 채 누워 있던 미르얌이 우리가 토론하는 것을 듣고 소리쳤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병든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고요! 엄마, 그 이야기를 좀 해드려요.” 이야기는 점점 안식일에 정결례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 어쩐지 하는 데까지 넘어갔다. 더 이상 듣다못한 마따디아가 갑자기 토론에 끼여들었다. “정결하다느니 부정하다느니 하는 이따위 논쟁이 나와 무슨 상관이오! 당신들 안식일법에 관한 것은 또 뭐고! 아니, 당신들이 우리와 이 아픈 아이를 조용히 내버려 두기는커녕 그 유식한 토론으로 다른 사람을 파헤치는 수작을 한다면, 당신들 자신이 안식일을 깨뜨리는 게 아니고 뭐요? 도대체 당신들 눈에는 이 아이가 아파 죽게 된 것도 보이지 않소? 당신들은 도와주기는커녕 돕는 것이 좋은가 돕지 않는 것이 좋은가, 허용되어 있느냐 금지되어 있느냐에 관해 떠들어대고 있지 않소. 하다못해 좀 조용히라도 해주는 대신에 말이오. 예수는 당신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소.” (게르트 타이센,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 한국신학연구소, 188-194쪽 참조)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법에 대한 고지식한 논쟁을 넘어서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을 백성들의 입에서 듣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깊은 믿음밖에는 없다. 그 믿음이 ‘너희를 살릴 것이다’.

[마무리 기도]

우리 인생의 치유자이신 주님.
당신의 손끝만 닿아도
아니, 한 말씀만 하셔도
내 영혼이 깨끗해지고
내 육신이 말짱해져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기쁜 낯으로 반기며
노루처럼 아들처럼 깡충 뛰며 달릴 겁니다.
내 받은 상처 더욱 옹이지게 만들고
우둔한 생각 더 완고하게 만드는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습마저 뛰어넘어
인간 인간 인간만을 생각하며
판단하고 움직이고 자유로 살아
당신께서 하신 일을 나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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