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모린, 교회는 죄인...기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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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린, 교회는 죄인...기도가 필요하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4.27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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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외로움>에서 도로시 데이는 다른 것들보다 연극의 주제를 강조했었다. 어떤 꾸밈, 예술, 감정과 신앙을 유발시키고 유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대화할 때 그는 자신의 혼동, 괴롭고 황폐한 조건들, 포스터의 경우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린위치 빌리지 친구들의 응답에 의해서 충분히 더 악화된 고통스러운 상황을 강조하였다. 그의 승리는 철저하게 노력한 승리였고, 그의 개종은 후회와 염려로 잘 달구어진 개종이었다.

성실한 진보주의자이며 주변에서 보여지는 사회경제적 불의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적이었던 그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잘못된 편에 서 있었던 기관(교회)으로 자신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였다.

기업가 같은 사제들, 그들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재물,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 흑인들, 멕시코인들,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의 부족과 억압,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산업-­자본주의적 질서가 그들을 억압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사제들은 아벨이기보다 카인이라고 자주 느끼게 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인가요?”, 교회는 사회질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교회에는 풍부한 자선이 있었지만 정의는 너무나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은 성사 분배자들이었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져다 주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게 해주며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와 일치감을 더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최악의 적들은 집안에 있다”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경고하였다.

자서전의 구절 구절에서 도로시가 가톨릭 교회 안의 어떤 요소들에 분노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대화하는 중에도 기억 속에 떠오르는 분노가 다시금 확인되었다. 그는 <긴 외로움> 책을 잡아서 페이지를 훑으며 어떤 페이지를 골몰해서 읽었고,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느낍니다.”
“어떤 식으로요?”

그는 자신이 읽고 있었던 페이지의 글을 내가 보았다고 짐작했던 것을 사과했다. 그리고 다시 크게 읽었다:

나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며, 성 패트릭 교회가 종살이 소녀들의 동전으로 지어진 것이고, 이민자들을 보살폈고 병원, 고아원, 탁아소, 착한 목자의 집, 노인들의 집을 세웠으나, 동시에 현재 필요하다는 개념에서 볼 때에 너무나 많은 자선을 만들어낸 사회질서에 대항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나는 자선이라는 말이 사람들을 숨막히게 만드는 말이라고 느꼈다. 누가 자선을 원했는가? 그리고 단지 인간의 자부심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강한 자각과 사람들 각자에게 돌아가는 정당한 몫에 대한 생각이 강력하고도 수많은 가톨릭 기관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후회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 글을 쓴지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는 사라지지 않는 열정을 갖고 글들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읽고 나서 그는 책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교회가 아직도 “그리스도가 바라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가 보여주는 뚜렷한 고뇌에 나는 놀랐다. 어떤 교회도 그런 기준을 맞출 수가 없을거라는 내 말에 그는 “사실”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여러 가지 결함에 대해 슬픔을 느꼈으며 “온 세계의 가톨릭인들이 예수가 말한 것에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 주의를 기울이기를”계속 희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기관의 무기력과 무감각이 가져오는 결코 끝나지 않는 문제들, 구조악, 제도악이 가져오는 문제들을 토론하면서 나는 그에게서 여전한 진보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때는 의자에서 자세를 곧게 세우며 나를 준엄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강렬하게 말했다.

권력가의 편을 들고 약한 이들을 잊어버리는 교회를 볼 때에, 그리고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는 주교들을 보고 가난한 이들이 무시되거나 찌끄러기들이 그들에게 던져질 때에, 나는 한때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가 모욕을 받고 있는 것이며, 한때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죽음으로 보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관리나 공직자들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보잘것없는 남녀들과 아이들, 예수 그리스도라면 가서 보고 도와주었을 그런 사람들에게 속합니다. 나는 가톨릭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사회적인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며 사용하는 것을 볼 때 난처하고 혐오감을 느낍니다.

피터 모린은 좋은 가톨릭인이라면 교회를 비참한 죄인이며 많은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고 여기며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나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헌신적인 가톨릭인 피터가 교회를 그렇게 표현할 때에 잠시 놀랬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렇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교회를 비참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종 했을 때 내 기분은 (그때 기분이 어땠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자서전에서 말한 대로 행복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읽고 있는 <긴 외로움>의 구절들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로 실망과 쓰라림도 함께 느꼈습니다. 나는 아직도 실망, 쓰림을 느낍니다.

나는 우리 주님의 생명이 늘상 살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배반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과 바깥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때 나는 바깥에서도 더 바깥에 있었던 내 무신론자 친구들이 주님의 일이라고 알고 있었던 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면 교회들, 개신교와 가톨릭의 교회들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고 있거나, 양다리를 걸치고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지요.

한 친한 친구가 나한테 와서 어깨를 움켜쥐더니 내가 가톨릭을 개종시키지 않고 있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난 그가 반가톨릭이거나 어떤 개신교파를 옹호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 자기는 ‘모든 교회들이 반 그리스도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난 그 친구의 말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이 남아 있었지요. 아마 절대로 지울 수 없을 겁니다. 그가 말했던 것을 들으면서 난 아직도 웃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데도 그의 말을 듣고 있어요. 다음 구절들을 썼을 때에 난 그 친구의 목소리를 머리 속에서 들었습니다: ‘그건 아주 오래된 전쟁, 계급 투쟁이다. 보스턴의 사코­반제티 사건을 생각했을 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두 사람들을 위해서 울부짖는 가톨릭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글이 있는 페이지를 지적하면서 그는 나에게 크게 읽어주었다.

 

그의 개종은 이전의 관점으로부터 극적인 전환이라기보다 생각해오고 있었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시인된 것이었다. 그는 교회에 들어오기 수년 전부터 지지해온 이상들과 예수의 가르침, 그분의 삶을 화해시키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른 한편 그의 개종은 타말을 낳고 엄마가 된 후 상식적인 결혼이 깨지는 때에 왔다. 그래서 그는 자서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난하고 정결하며 순종하는”,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그와 함께 얘기를 나누면서 이 단어들이 계속 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고 특히 정결이라는 말이 남아 있었다. 이런 감각적인 여성이, 남자들에게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 여성이 왜 가톨릭교회가 정결을 요구하고 있다고 느껴야 했는가? 그는 가톨릭이 된 후로 결코 남자와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에너지와 열정도 참으로 방랑적인 삶으로부터 매우 엄격하고 종교적인 생활로 “개종”했다.

친구들은 이런 그의 변화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너무나 궁금했고 그가 아직 젊고 매력적이었을 때 감정적이고 성적인 삶으로부터 결정적인 변화를 했던 사건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었다. 그는 자주 친구들의 의견에 대해 말했지만, 그들의 사회정치적인 견해에 대해서만, 교회가 당시의 “권력층과 상류층”과 어울렸던 것에 대한 평가 같은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얼마가 지난 후 나는 내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문제를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만일 내가 여기에서 가지를 뻗는 것이라면 말해 주십시오. 그런데 당신에게 개종은 성적생활의 끝이라고 여겨졌는데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주제를 끄집어 낸데 대해서 다시 한번 내가 사과한 후에, 그는 말을 시작했다,

“난 그런 개인적인 질문들을 걱정하지 않아요. 당신은 무엇인가 알고 싶고 나는 이미 그런 질문들에 대해 많이 써왔으니까요. 물론 내 이야기는 글 중간 중간에서 더 많이 발견될 수 있겠지만요. 내가 교회에 들어간 것에 대해 쓴 것에서 정신과 의사들은 많은 것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내 행동 안에서도 많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난 살기 위해서 죽고 싶었고 낡은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고 싶었다’고 썼던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어요. 이 말들이 수주일동안 내 마음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래서 종이에 그것을 적었는데, 그 종이 조각을 잃어버렸어요. 난 일생동안 종이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찾아본 적이 없습니다.

온갖 쓰레기통을 다 뒤졌고 스웨터와 겉옷 주머니들을 다 찾았어요. 내 친구들은 아마도 내가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도대체 왜 종이쪼가리 하나가 너한테 그렇게나 중요한거지?’ 한 친구가 나에게 소리쳤어요. 난 그때 분노가 폭발했었다고 기억이 나요. 그는 술을 마셨고 나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어요. 그는 사실 나를 도우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렸던 것 같아요. ‘자, 진정하라’고 나는 자신에게 타일렀습니다.

나는 ‘문자가 아니라 영’이라고 했던 바오로 사도의 말이 생각나서 위층으로 올라가 앉아서 종이에 그 문장을 기억하면서 적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한시간 후에 찾고 있었던 종이가 나타났는데, 그건 내가 읽고 있었던 책 안에 있었어요 ­ 아니, 어떤 책인지 기억이 않나네요.

난 두 종이의 글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두 글은 말마디까지도 전혀 틀리지 않고 아주 똑 같았어요. 그리고 나서 나는 잃어버렸던 종이에 나 자신에 관한 문장을 하나 더 적어 넣었어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다른 모든 여성들처럼 나는 내 사랑과 일치되기를 원했다.’ 난 그 종이를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았고 그 글을 타자기로 다 친 후에야 버렸습니다.

난 이 글들이 나의 개종이 무슨 의미인가를 내 자신에게 말해주고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그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고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답하는 유일한 올바른 길은 바로 나 자신에게 대답하는 것이라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영혼에 대한 온갖 추구 후에 당신이 참으로 깨달은 바를 말하는 것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설명이라는 것입니다. <긴 외로움>에서 내가 말했던 것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그냥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많은 되풀이를 하고 있지요.

“스물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데도 향하는 곳 없이 그냥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난 마음껏 활동적인 삶을 살았고 많은 좋은 사람들, 흥미롭고 지적인 사람들을 만나서 기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티와 정치적 토론에 몰두하는 것 이상을 염원했습니다. 비록 여전히 앉아서 세상사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지만 말입니다.

포스터와 사랑에 빠졌을 때 난 그것이 견고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그런 사랑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내가 허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남자와 여자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비록 그 사랑을 너무나 즐기고 있었고 포스터와 내가 아주 밀착되어 있었어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임신했을 때 난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이 아이라고, 엄마노릇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것도 답이 아니라는 것을 또 알았습니다. 난 포스터를 사랑했고, 임신했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타말이 태어났을 때는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서 타말을 안고 또 안았으며 내 삶의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고 인정해야겠네요. 아니, 그건 어떤 불안감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내가 말을 중단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과 나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가톨릭이 되기 전의 뉴욕시절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에 그들은 늘 내 외로움과 불안감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외로움에 대해 말한 것이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외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영적인 허기, 굶주림을 의미했던 것이지요.

내 안에 있는 외로움, 아무리 내가 행복하고 개인적인 삶이 충만하게 채워졌다 해도 내 마음 속에서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한번은 쟉끄 마리땡과 앉아서 얘기를 하다가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이해하기 바라지만 아무도 영혼을 이해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칭찬하고 싶을 때 쓰기에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영혼이라는 단어를 뿌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는 훌륭한 영혼을 갖고 있다고.

그러나 마음이라는 단어를 쓰게 될 때 사람들은 진짜로 심각해지고 분석적, 심리분석적으로 변합니다. 그는, 마리땡은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지금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만일 우리가 서로 배려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요.’ 나는 그의 말이 고마웠고, 특히 ‘배려한다’는 말이 그랬습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조심하라고, 많은 사람들이 함정에 빠지며, 모두가 함정에 즐겨 머문다고 해서 같이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영혼에게는 심리가 있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먼저 그들이 왜 이 지상에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하느님께 아니오, 이곳의 우리 삶을 이해하려는 탐구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에게 왜라고 묻습니다. 나는 일생동안 라고 물어왔습니다. 왜라는 물음을 던질 때 당신은 혼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다른 사람들에게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계속하면 당신은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쉴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왜 우리가 여기에 있으며 이곳에 있는 시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아해 합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쟉끄 마리땡이, 그리고 물론 피터가 자신들에게 던졌던 똑같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난 피터도 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는 언제나 나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는 보통 의미의 가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피터에게 크고 아주 매력적인 가족이 있었다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그리워했다는 의미에서만 볼 때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진짜는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로지 그가 본 것 때문에, 미리 본 것 때문에, 그러한 만남의 순간 때문에 인간 세계와 거룩한 세계의 화해를 보고 외로워한 것입니다. 오, 여기서 내가 좀 비약하고 있는것 같네요!”

그는 내가 무엇을 알기를 바라는지 분명하게 밝혔다. 그의 개종에 관한 한 “심리학”은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른 기회에 그는 자신의 개종을 탐색이라고 볼 때 심리학이라는 주제가 합리화될 수 있다고 말했었다. “나는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에 의해 쓰여질 수 있고 우리를 그분께로 더 가까이 이끌거나 불행하게도 그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으며, 그 모든 것에 우리가 가진 정서적, 감정적 문제들도 포함됩니다.”

내가 그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이런 문제들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다루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이미 <긴 외로움>에서 많이 다루었어요.” 그는 그 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더 하지 않았고, 그 단호한 침묵의 익숙한 모습이 더 이상 심리학적인 성찰에 대해 묻지 않도록 나를 설득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서전에서 그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독자가 <열한번째 처녀>에서 흥미로운 것을 더 발견하든 안 하든 <긴 외로움>은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의 쾌락주의가 자서전에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또한 자서전은 중요하게 생각했던 정치 경제적 명분을 추구하면서 기꺼이 감옥에 가겠다는 그의 의지와 열정적인 사회적 양심도 설명한다.

그렇지만 또 어떤 시점에서 그는 자기 안에 또 다른 울부짖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나가 아니라 어떤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갈망을 갖고 있었고 그 갈망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이 울부짖음을 깨달았을 때에도 외로울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또한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의 갈망은 갈릴래아, 에덴동산, 도시의 울부짖음들, 수세기 동안의 가장 큰 울림에까지 이르는 아주 오래된 갈망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외로움은 존재론적인 것이었다. 그의 불안감은 목적지가 아직도 너무 멀리 있는 여행객의 초조와 허기를 표현해 주고 있었다. 침묵 속에 함께 앉아 있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몇 마디 하였다. “나의 개종? 나의 개종은 내가 어디론가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나머지 삶을 다 그곳에 가려고 노력하는 데에 쓰고 목표를 지향하는 선상에는 없는 모든 부차적인 여정들, 소풍들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내 자신에게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지요.”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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