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끊임없이 새로이 거듭 인연을 만드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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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끊임없이 새로이 거듭 인연을 만드시는 분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4.19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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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7

책꽂이를 치우며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 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오는 것을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6-10)

인연의 사슬

창녀촌 곁의 좁은 골목이지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을 깁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방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집들. 그래서 이 골목 사람들은 길가에 나와서 소일거리를 하곤 한다. 배추를 다듬거나, 좁고 긴 평상을 끌고 나와 아직 식지않은 수다를 늘어놓거나 구슬을 꿰는 부업을 하곤 한다. 아이들이 숨박꼭질이며, 고무줄 놀이를 하는 곳도 이 골목이다.

그 할머니는 이 골목에서 찐감자를 팔았다 . 그녀는 감자를 깎는 일말고는 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누구에게 말을 거는 일도 없었다. 그 번잡한 골목에 살면서 그 누구와도 함께 살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고통과 근심의 굴레를 스스로 얹는 짓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깊이 팬 주름살은 남편과 자식들이 남긴 쓸쓸한 상처였다. 남을 위해서 바치던 청춘을 아쉬워하며, 이제 혼자 그냥저냥 살면 족했다. 한때는 적은 돈이라도 모아 집칸이라도 장만하려고 했지만 억센 운과 고약한 인연으로 날려버리고 이젠 그냥 하루하루 감자를 깎으며 살기로 했다. 남들은 사는 게 지겹다는데 할머니는 고통스럽지만 않으면 그걸로 그뿐이다. 남들과 인연만 맺지 않으면 그 고통도 겪지 않는 법.

언제나 지나치는 길에 감자를 사먹던 젊은이가 있었다. 두 다리가 모두 잘려나간 그 청년은 거무튀튀한 고무를 뒤에 매달고 두 팔로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행인들에게 적선을 청했다. 어느날 청년은 그 할머니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한 창녀를 사랑하게 된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슬픈 눈망울을 짓고 있는 청년에게 할머니는 말없이 감자만 내밀 뿐 아무 위로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넋두리하던 청년은 “할머니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아도 난 할머니가 좋은 사람인 걸 알아요.” 하며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한참 감자를 깎고 있는테 문득 보니 서너 살 된 여자아이가 물끄러미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멈칫거리다 감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자아이는 정신없이 그 감자를 먹어 치우곤 또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또 감자 하나를 집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얘야, 이제 그만 집에 가거라.” 할머니는 그 아이를 돌려보내곤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한참 언덕바지를 올라 집 가까이 와서야 그 아이가 거기까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게 먹을 걸 준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었어요.”

길을 잃은 아이일까, 아니면 누가 길에 버린 아이일까?
“그럼 오늘 밤은 나와 자고 내일 파출소고 어디고 데려다 주마.” 그러나 할머니는 또다시 인연의 사슬에 묶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어린것을 어떡하누!” 이 아이가 할머니에게 과연 예수인가?

 

생명의 여울목, 사마리아

이 이야기는 작가 김향숙의 「부르는 소리」를 필자가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연’의 모질고 아픈 상처를 대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쓸데없이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던들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보듯이 인간의 교만을 견딜 필요가 없으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연을 맺지 않으셨던들 그들의 배신을 맛보고, 또한 자녀를 바로 세우기 위해 벌주어야 하는 아비의 아픈 가슴을 하느님께서는 체험하실 까닭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끊임없이 새로이 거듭 인연을 만드시는 분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 모진 인연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했던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남성인 제자들과 인연을 맺었다고 요한은 전한다. 그러나 곧 이어 갈릴래아로 가던 길목에서 한 여인과 인연을 맺는다. 그 여인의 속 깊은 사연을 헤아리시고 다독거리시며 생명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이 자리에 굳이 남성 제자들이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단독으로 만나 대화를 주고받으며, 하느님 나라의 비밀로 초대받는다. 그 여인이 유독 뛰어난 미모와 학식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이며, 여러 번 결혼했거나 현재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여인이다.

그 여인이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인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요한 4,9) 하고 말했듯이, 어엿한 유다인이라면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할 만한 사람들로 취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결하고 우상숭배를 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먼저 물을 청한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필요 때문에,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청하는 경우는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팍팍한 길을 오래 걸어서 목이 말랐던 예수님에게 물 한 그릇은 얼마나 귀한 것이던가. 우리는 <벤허>라는 영화에서 노예로 팔려가던 벤허에게 물을 건네주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유다인들만큼이나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다인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인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예수님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물을 건네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는 편견을 뛰어넘어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될 때,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갈증 해소를 위한 영원한 음료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신 적이 꼭 두 번 있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와 십자가 위에서였다. 십자가 위에서 그 분이 “목마르다.” 하시자, 병사들이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예수님의 입에 대어드렸으나 예수님은 맛만 보시고 그대로 돌아가셨다 (19,28-30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장황한 설득작전을 펼치신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4,10) 그리고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원하신 것이 ‘갈증 해소’였는지, 아니면 여인과 인연을 맺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여인은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고단한 삶이 생활적 이익에 대한 집착을 낳았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그 사람 속에서 샘솟는 물”을 줄 수 있다고 암시한다. 그러자 즉각 그녀는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4,15) 하고 물을 청하였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이해타산을 먼저 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그렇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사마리아 여인이 기대했던 ‘물’은 서로 다른 것을 뜻했다. 현실 그 이상의 것,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녀는 갈증을 해소하고 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물을 원했다. 그리고 그것도, 편하게 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터였다. ‘물질의 풍부함’ 과 ‘편리한 생활’에 대한 유혹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그녀에게 접근하신다.

남편이 다섯이나 ···그리고

먼저 그녀로 하여금 감추고 싶어하던 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남편을 불러오라.” “남편이 없는데요.” “네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고, 지금 동거하는 남자도 사실 네 남편이 아니니 솔직히 말한 거다.” 그녀가 둘러댄 말을 자존심 상하지 않게 뒤집어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녀를 어둠에서 빛 한가운데로 나오게 만든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숨길 게 없다. 예수께서 그녀의 처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녀의 처지는 몇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1)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당시 사마리아는 다섯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다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한다. 이 우상을 우리는 다양한 편견(고정관념)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 편견은 인간 사이를 분열시키고 결국 이기심에 따라서 상대방을 악마로 만들곤 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데올로기다. 반북·반공 이데올로기, 자기 민족우월주의···등 온갖 주의(主義)가 진실을 가리고 반쪽 진리를 강요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유다인에 대한 원망과 현실적 가난으로 더 깊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2) 사마리아 여인은 기구한 팔자 속에서 살아왔다. 한 남편에 의지해 다복하게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러 번 남편을 여의고, 이제는 법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제 한 몸 받아준다면 어느 남자든 개의치 않고 함께 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에서 과부가 생계를 연명하기란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여인이 이렇게 생계 때문에 여러 남자를 거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의 연민을 자아낼 만하다.

그녀는 일단 하느님께서 허락한 생명을 제 마음대로 절단 내지 않았다. 또한 이 순간 예수님은 홀몸으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 마리아가 겪어야 했을 고통도 기억했을지 모른다.(여러 학자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에 요셉에 관한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요셉이 요절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물도 마시고 인연도 맺고

예수님은 이제 분열된 세상과 분열된 종교에 대해서 말한다.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4,21)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성역화 한 것에 대응하여 그리짐산 위에 성소를 짓고 예배를 드렸다. 이는 종교적·정치적 분열의 결과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고, 장소에 얽매이지 않으시며, 영적으로 진실되게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마다하는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상징적으로도 분열된 인류를 화해시키신다.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평화를 위한 인류의 갈증을 해갈시켜 줄 수 있다. 전쟁과 다툼, 분열과 죽음을 넘어서 생명으로 인간사회를 이끈다. 예수님에게 ‘물’ 이 단순히 목마름만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뜻하는 것이듯이 (4,22), 그분이 말하는 양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그 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4,34) 이다. 그리고 이때가 벌써 왔다는 것이 그분의 메시지이다.” 곡식이 이미 다 익어서 추수하게 되었다.”(4,35)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심은 예수님도, 이 복음을 제 몫으로 거둬들일 제자들도 모두 기뻐하게 될 것이었다(4,36).

그 메시아가 바로 그 동안 대화를 나눈 이 사나이, 예수라는 것을 알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아예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메시아 오심’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 (4,28-29, 39-42 참조) 결국 예수님은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었다. 여인이 버려두고 간 물동이에서 마음껏 물을 퍼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그 여인을 당신의 증인으로 인연 맺었다.

정갈한 물로 세상을
청소하러 오시는 주님.
구태여 사마리아 땅에서
죄많은 여인의 두레박을 빌려
물을 건네 받으시려는 
당신의 마음을 
우리가 미리 헤아려 알 수 있었다면,
교회당 십자가 수만큼은 
적어도 세상이 맑아졌을 테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맑은 손
깨끗한 그릇
빛나는 빗자루만 찾아다니다
우리 손만 더럽히고
마음은 어두워져
저녁보다 먼저 어둠에 묻히고
창녀보다 더러운 영혼 한탄합니다.
나는 옳고 항상 너는 그르다고
나는 깨끗하고 항상 너는 더럽다고 가르면서
주님께서 나를 청소하러 먼저 오신줄

내 몰랐습니다.
내 스스로 걸레인듯
겸손한 마음으로
내 때로 세상을 닦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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