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영성과 성지영성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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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영성과 성지영성 사이에서
  • 김유철
  • 승인 2016.07.18 14: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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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부도탑 같은 성지가 그립다. 하기는 부도탑도 부도탑 나름이다.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이라는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사찰 입구에 ‘공원묘지’처럼 보이는 대리석 탑들을 ‘진열’해 둔 곳도 점점 더 많아지는 듯하다. 허나 손길이 없거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도(浮屠/浮圖)를 부도로서 남겨둔 사찰을 드물게 만나면 누가 굳이 시키지 않아도 그 탑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 미학적 용어에서 말하는 그 고졸미와 적막함이 어우러진 죽은 자가 건네는 무언의 가르침은 산 자의 말 그 너머에 있다.

ⓒ김유철

성지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 종교가 말하는 성지란 무엇인가? 성지순례는 무엇을 위한 일이며 그곳을 찾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초기 교부시절부터 간혹 써왔지만 중세이후 교회사 안에 등장한 성지(라:terra sancta/ 영:holy land)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배경이 된 장소’라고 교회는 말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과 관련된 성스런 땅 - 예컨대 하느님이 임재 하였거나 다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는 곳, 혹은 특별히 신성하다고 생각되는 곳 - 즉 성지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경신(敬紳)행위의 하나’라고 <가톨릭대사전>은 밝히고 있다.

한국천주교회가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성지’라 하면 하느님과 관련된 장소보다는 순교자와 연관된 장소로 일단 접근한다. 순교자가 목숨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 하였기에 그것이 같은 의미일 수 있겠지만 순교지와 성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것이 같은 것이라면 교리시간 혹은 대사전의 내용을 좀 바꾸어 놓고서 현실을 논해야 한다. 사실은 현재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가톨릭교회 교리서>(cbck. 2008. 개정판)와 <한국천주교 견진교리서>(cbck. 2006. 개정판)에는 성지와 관련 된 내용이 없다. 조금 아이러니컬하다.

순교자영성과 성지영성의 분간

어찌되었건 한국천주교회는 순교자의 영성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려 한다. 아마 순교자의 영성이 한국천주교회를 이루는 초석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회는 우리에게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 그리고 최양업 가경자를 비롯한 복자 예비심사에 들어 있는 많은 순교자로 이루어진 교회이기도 하다.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2016년 현재 남한만 해도 405곳의 ‘성지’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주교회의 성지순례 사목소위원회는 ‘성지’ 111곳을 소개하는 책자를 출판한 바 있다. 그 많은 장소들이 과연 오늘 한국천주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말은 무엇일까? 아니 한국인들에게는 그곳이 어떤 의미일까?

순교자들이 ‘목’을 내어놓아야 했던 당시의 조선사회와 교회사에 대한 이해 없이 ‘순교’라는 말에 몰두해서는 그곳이 그저 거룩한 땅, 다시 말해 장소의 개념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하여, 그런 장소를 다녀오는 행위를 우리는 ‘성지순례’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순교자영성과 성지영성의 분간이 시급하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의 영성과 ‘땅’의 영성은 다른 것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3.5)하던 그 음성을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를 오류의 길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

멈춰야 할 일과 생각해야 할 일

소박한 부도탑 같은 성지를 바란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더 소박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진정 소박한 일상에서 실현하고 싶다면 지금 같은 성지순례를 조장하고, 광고하고, 선동하는 움직임을 중지해야 한다. 최소한일지 모르지만 한국의 두 메이저 교구가 발행하는 교계신문에 버젓하게 실고 있는 14박15일, 500만원을 넘어가는 ‘크루즈’ 성지순례는 제발 멈추어야 한다.

정말 그렇게라도 가고 싶으면 -가게하고 싶으면- 몰래 계모임을 해서 다녀오길 진심으로 권유한다. 돈과 시간이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의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는 교계언론이 신자들을 좌절시키는 것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우리 일상 앞에서 만나는 선택이며 초대이다.

다른 한편 이른바 성지를 ‘아도’ 찍은 성직자와 수도회에 대한 생각도 이 기회에 하고 싶지만 조금 미뤄둘까 한다. ‘성지’라 불리는 장소를 일구는데 애쓴 그들의 노고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곳을 마치 영구적으로 할양 받은 듯한 자세와 그곳을 할양해 준 듯한 각 교구의 모습은 중세교회를 보는 듯할 때도 있다. 십자군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교황은 파드로아도(Padroado), 파트로나테(Patronate)라는 ‘보호권’을 부여했다. 교황이 부여한 보호권은 군주나 귀족이 성당이나 부속건물을 건축하였을 경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몇 가지 특권을 허용한 것을 말한다. 앞서 말한 군주나 귀족 자리에 성직자 혹은 수도회를 주어로 집어넣는다면 지금의 성지 관할(?)에 대하여 줄인 말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하느님에 대한 예배의 자리, 일상

성지나 순교지 모두 우리에게 중요한 자리임에 틀림없으며 우리 신앙에 이정표가 되는 장소들이다. 그러나 그곳이 국립공원이거나 공원묘지처럼 단정하고 엄숙하고 숨죽이며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기쁨의 자리로, 위로의 자리로 무엇보다 살아있는 하느님에 대한 예배의 자리로 신앙인들에게 다가오길 바란다. 들풀사이에 비바람 맞으며 서있는 부도탑 같은 자리. 그곳이 우리의 성지이며 우리가 오늘도 하늘의 문을 두드리며 순교할 일상의 자리이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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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천 2016-07-19 11:10:55
멈추고 생각하게 해주신 글 참 고맙습니다.
성지에 대한 분별과 아울러 순례에 대한 성찰도 절실히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지(순교지)에 가서 미사(예배) 드리는 것을 순례라고 오해를 하니, 크루즈 성지 순례같은 왜곡된 현상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순례는 목적지의 결과이전에 그 과정이 훨씬 더중요합니다.
순례의 어원은 "(광야)를 가로 지르다(건너다)." 입니다.
순례의 의미에는 "시련,고통,두려움,외로움 그리고 지름길 "이라는 뜻이 함께 어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