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에 치명적인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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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에 치명적인 부동산
  • 최태선
  • 승인 2021.04.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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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내게도 부동산이 있었다. 압구정동은 아니지만 분당에도 있었고 인천에도 있었고 평창 근처 횡계에도 있었다.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내 말년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좋았을까, 나빴을까.

사람들은 당연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만일 내게 그 부동산만 그대로 남아있더라도 나는 지금처럼 별 볼일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별 볼일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의 의미는 한 마디로 교만이다. 나는 내 소유를 가진 만큼 교만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나빴을 것이라는 말이다. 부동산은 내 영혼에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소유는 반드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실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다. 소유는 존재와 분리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소유 자체가 곧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 인간이다. 부동산만이 소유가 아니다. 지식이나 학위나 명망이나 솜씨와 같은 것이 모두 소유이다. 그런 소유들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다시 말해 소유와 존재는 결합되어 하나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런 소유가 많을수록 인간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를 늘려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한다. 그렇게 늘어가는 소유에서 인간이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라. 빌립보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 찬가’를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애창했을까.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일까. 그리스도교는 왜 인간의 불행을 의도하는가. 예수는 사디스트나 니힐리스트와 같은 분이셨는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 인간은 소유가 늘어갈수록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그리스도 찬가’의 주제는 ‘자기 비움’이 아닌가. 소유는 존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에게 절대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인간을 부인하시는가. 아니 애초에 인간을 잘못 만드신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깊이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적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의문이 일지 않는가.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라. 그러면 생각의 갈레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찬가’를 우리의 마음에 품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처럼 성서가 우리에게 분명히 명하고 있는 것을 과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인 '나'는 정말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리스도 찬가’를 찬송으로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에 새기려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수도자들이나 양심 때문에 파문을 당한 목사들과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는 당위를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존재의 변화를 말하고 그것은 반드시 삶의 변화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니거나 잘못된 그리스도교가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찬가’가 빈 껍질이 된 것처럼 허무맹랑한 종교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초기교회에서 찾는다. 그것을 초기교회에서 찾는 것은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본질을 되찾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허무맹랑한 종교가 된 이유를 양심에서 찾는다. 서기 314년, 교회는 믿음을 저버린 자들을 제명하는 것으로 처벌할 뿐 더 이상 그들의 양심에 묻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양심을 버린 것이다.

나는 양심이 인간 존재의 핵심이며 인간에게 심겨진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양심의 회복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려면 바로 이 양심의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찬가’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임과 동시에 우리가 품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발로이다. 자기 비움은 단순히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자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소유를 비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양심의 회복이 아니라 이러한 모순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 양심을 버렸다.

초기 교회에서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법관과 전쟁에 나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군인들은 자기의 직업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양심이었다.

생각해보라. 법관과 군인이 어떤 존재인가. 그들은 힘의 대명사이다. 권력의 대명사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힘과 권력, 다시 말해 폭력이 교회 안에 자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양심을 버린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온갖 논리들이 횡행하게 된 것은 교회가 초기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양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양심이 그것을 보게 하고 반복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성서는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한다. 선한 양심이 있어야 복음의 삶을 실천할 수 있고, 그 실천 여부를 경계하는 거울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심이 있다면 세습과 같은 악행은 교회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다. 양심이 있다면 원로목사와 담임목사가 권력을 두고 다투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양심이 있다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일탈이 자연스러워진 것은 교회가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한 점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를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할 수 있는 것도 양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바울은 디모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것을 선한 양심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회복된 양심을 그렇게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 아닌가.

교회가 되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양심이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찾아야 할 것도 바로 이 양심이다. 교회 안에서 양심이 작동할 때,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회복될 때, 그리스도교는 다시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부동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가질 수 없다. 나는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을 회복하여 불쌍한 영혼들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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