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얼마나 간수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선물인가?
상태바
'자유'는 얼마나 간수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선물인가?
  • 박철
  • 승인 2021.04.12 2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철 칼럼

50만년 이라는 장구한 인류의 삶 가운데 불과 5천 년이란 짧은 기간에 인류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유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까닭이라고 본다. 말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말과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한계란 실로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춤과 노래, 그림을 통한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든 상징적 요소를 다 제거해 버린다면 하느님과 인간과의 소통은 불가능하리만큼 삭막하고 공허하게 될 것이다. 상징과 우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종교는 그 어딘가 삭막하고 빈말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실존철학가 키엘 케고르(Kier keger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본질은 지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지만 평범한 인간에게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걸림돌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정숙한 주부가 요란한 무희복을 입는 것보다 더 역겹고, 엄격한 재판관이 건달 같은 유행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다."

그가 말한 걸림돌이란 무엇을 두고 한 말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상식적인 논리로는 감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기독교의 역설적인 가르침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사실 나자렛 예수의 생애, 그 자체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그분의 가르침은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역설이 깔려 있는가. 맹신적이고 광신적인 교리에 입각하여 대화가 단절된 선교나 어설픈 신학적 지식으로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의 심오한 비밀을 마치 상인이 고객 앞에서 물건을 골라 주듯 가벼운 몸짓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보석상자 속의 보석은 훌훌 털어버리고 상자만을 챙겨 넣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두려함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지혜서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신비 앞에 인간이 지녀야 할 경외심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일 거라 여겨진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예수의 이 설교로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예수를 떠나갔다(요한 6,66)고 요한 복음사가는 보고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그분의 사랑과 헌신, 죽음을 통한 희생을 체험하지 못하고 인식적인 사고의 차원에서 그를 바라보았을 때, 이 예수의 말씀은 그들이 넘어설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곳 갈릴래아 사람들과 같이 두터운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도 이 말씀은 예외 없이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말씀을 가리켜 신학자 요하네스 부어스(Johannes Bours)는 '믿음의 결단'을 내릴 수 없을뿐더러 거부하는 사람들 세대를 통하여 꿰뚫어 본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 날까지 그 깊고 심오한 현의(賢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우리는 고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미는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삶으로 체득하여 그분 안에 거듭 태어나는 신비를 깨달아 그분과 함께 살아갈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물러가고 싶습니까?"하고 예수는 그를 떠나간 많은 제자들 등 뒤에서 그의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하고 예수께 고백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의 말씀을 모두 알아듣고 얻은 결론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가 그때까지 예수와 함께 살았던 그 사무치는 삶의 체험, 즉 인간에 대한 예수의 끝없는 연민과 무한한 사랑에서 그는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여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얻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뢰, 그 신뢰로부터 그는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하신 예수를 통하여 그는 이미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음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는 똑같은 질문을 해 오실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예'와 '아니오'로 결단을 내려야 할 매순간 예수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계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계신다. 장마철 수렁 같은 질펀한 탐욕 속에서 앞으로 다투어 '나와 우리'라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심으로 팽팽히 둘러쳐진 울타리 속에 황금빛 환상의 행복을 쫒아서 서로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 같은 우리의 삶 그 한가운데서, 그분은 "당신도 그들을 따라가겠소?"라고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계신다. '하느님과 맘몬 그 누구를 따라 나설 것인가?'하는 끝없는 결단 앞에 서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이러한 자유로운 결단으로 인간은 평화와 행복을,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품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비운의 시대, 폐허의 참담한 어둠 속에서 빛의 제단으로 비상하려 했던 시인, 공초 오상순은 이 세상을 떠나며 "자유가 나를 구속했구나."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의 믿음 앞에서 '자유'는 얼마나 간수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선물인가?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성이는 것이 인간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이 자유 때문에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초대하는 그분께 응답을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것이다.

진리의 빛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그 막막한 삶의 구렁텅이, 그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그분은 바로 우리 곁에 자비로우신 아버지로서 큰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맞이하고 계신다. 다만 우리의 결단이, 일어나 그분께로 향하는 그 자유로운 결단이 언제나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걸림돌이 넘어서서 깨달음의 길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순시기를 지나 만물이 소생하는 이 아름다운 부활의 계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진정한 구도의 길에 대하여 새로운 각성과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