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 찰나의 기쁨에 충실한 종교이고 철학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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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 찰나의 기쁨에 충실한 종교이고 철학이라면
  • 유대칠
  • 승인 2021.04.0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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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뜻으로 보는 철학사-4

이 세상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한다. 어린 시절 살던 어느 작은 동네는 지금 흔적도 없다. 그 자리엔 제법 큰 백화점이 세워져있다. 그 백화점도 처음과는 제법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천 년 만 년 이어질 것 같은 독재자의 권력도 무너져 내리는 것이 세상이다. 다 변한다. 그것이 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니 싯다르타의 말처럼 그 가운데 하나를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헤라클레토스(Herakleitos, 기원전535?-기원전475?)는 기원전 500년경에 살았다. 그는 우주의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쉼 없이 변하고 충돌하는 그러한 상태에 있다 그는 확신했다. 그의 유명한 말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그의 생각이 담긴 말이다. 같은 강물이라 보이지만 사실 처음 담근 그 강의 물들은 이미 흘러 바다로 가 버렸을지 모른다. 그 사이 같은 강으로 보이지만 강은 쉼 없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세상들 가운데 하나라도 영원한 것이 있을까. 나의 어린 시절 동네가 백화점이 되고 그 백화점은 다시 쉼 없이 리모델링을 이어가고 있고, 그렇게 과거 어린 시절 동네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어느 순간 이름만 같은 동네일 뿐 더 이상 나의 어린 시절 동네가 아닌 곳이 되어 있었다. 40대 중반의 나의 기억 속 그 동네와 30대 중반을 살아가는 이의 기억 속 그 동네 그리고 20대와 10대의 기억 속 그 동네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사실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삶을 우린 살고 있다. 그 동네를 잘 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누군가에겐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혹은 이젠 별 의미 없는 과거의 지난 이야기일 뿐일 수 있다.

이름만 같을 뿐 시간에 따라 쉼 없이 변화하는 것이 세상이다. 그 쉼 없이 변화하는 매 순간의 존재들은 또 인식하려는 이들의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서 또 다르게 이해되고 판단되는 것이 세상이다. 그렇게 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같은 시간이라도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세상이다. 지금 나에게 이 길은 오르막이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선 누군가에게 내리막일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서 세상은 더욱더 풍성하게 다양해질 수 있다. 그것이 세상이다. 원래 변하고 그 변화의 수보다 더 많이 다양하게 관념화되는 것이 세상이란 말이다.

쉼 없이 흐르며 변화해야 그것이 강이다. 마찬가지로 쉼 없이 변하고 또 변하고 또 다시 변해야 그것이 세상이다. 그러니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하듯이 같은 세상을 두 번 살지 못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참된 지식이란 사물을 감각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얻는 것이라 보았다. 감각은 쉼 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쉼 없이 변화하는 지각의 정보들을 우리에게 주지만 그렇게 변화함에도 그것의 변화하지 않는 그 무엇임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젠 모두 사라져 흔적도 없는 과거 마을의 모습들, ‘우물’과 ‘공용수도’ 그리고 ‘공용화장실’... 내가 좋아하던 핫도그 집, 내가 심부름을 하던 작은 가게... 어느 하나 남아있지도 않고 흔적도 없다. 그 자리에 세워진 백화점, 그 백화점에서의 시간들... 사랑하는 이와의 데이트 그리고 조카의 돌잔치... 서로 어떤 연결도 보이지 않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정신으로 인하여 하나로 연결되며 그곳은 어떤 곳이라 부른다. 스스로 쉼 없이 다양한 모양으로 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소멸하게 하지만 동시에 생성의 원리이기도 한 불, 항상 변화하지만 여전히 그 자체는 불로 머물고 있는 불, 그 불을 알아보는 정신, 세상은 바로 그 불과 같은 곳이고, 정신은 그 불을 알아보게 하는 유일한 사람의 능력이다.

산을 오르는 이에게 이 산은 힘겨운 오르막이다. 힘겨움으로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 감각이 그 산의 모든 것이 아니다. 산을 내려오는 이에게 이 산은 쉬운 내리막이다. 큰 어려움 없이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도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역시 그러한 감각만이 이 산의 모든 것은 아니다. 산은 결국 산이다. 인식하는 나의 시선에 따라 이래저래 다르게 감각되지만 결국 그 산은 산이다. 매해 서로 다른 싹을 위한 터가 되고 수많은 나무들과 생명체들이 생성 소멸하는 터가 되지만, 그렇게 매해 쉼 없이 자신을 변신하고 있지만, 그 산은 산으로 존재하고 있다. 불이 쉼 없이 변해도 불이 불로 존재하듯이 그렇게 말이다. 그리고 그 불을 우리의 정신이 알아보듯이 그 산을 우린 알아본다. 바로 그 산이라고 말이다.

변하는 세상을 ‘감각’하지만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에서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을 향하여 애쓰는 것이 우리 사람의 정신이다. 권력의 변화와 이런 저런 세상의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은 어떤 가치를 고집하기에 우린 철학을 필요로 하고 우린 종교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그저 변화만하는 것으로 보이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 어떤 변화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게 해주니 말이다. 만일 철학과 종교가 이런 저런 권력의 흐름에 따라서 그때그때 순간의 쾌락만을 이야기했다면 사람들은 그런 철학과 종교에 큰 지혜를 기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상상해보자. 권력자가 총과 칼로 권력을 차지하자 그의 편이 되어 앞잡이가 되는 종교라면, 그리고 그들의 거짓된 무지를 화려한 수사어구로 장식해주는 철학이라면, 그것으로 이런 저런 하사품을 받을 생각에 기뻐하는 종교이고 철학이라면, 영원을 향한 정신의 애씀을 포기하고 그렇게 그때그때 찰나의 기쁨에 충실한 종교이고 철학이라면, 어쩌면 처음부터 쓸데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유혹에도 불구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려는 사람의 노력, 어쩌면 그 노력이 철학이고 종교일지 모르겠다. 감각하는 모든 것의 이면에 정신으로 보아야하는 어떤 것을 보라며 우리에게 지혜를 권하는 것이 철학이고 종교일지 모르겠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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