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요일 아침에 향유 부은 여인을 다시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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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요일 아침에 향유 부은 여인을 다시 생각하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4.03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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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 2021.4.2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1. 오세훈과 박형준의 죄는 사회적 세례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세례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의식이 아닙니다. 소소한 잘못을 씻어내라고 세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 모인 군중들에게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말할 때, 이는 그동안 자기 자신을 알게 모르게 사로잡았던 계급에서도 벗어나라는 요청입니다.

2. 그들은 금수저 가운데 금수저, 강남 사람만을 '사람'으로 보는 기득권층의 시각이 뼈마디에 골골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이들의 '자제'들은 비강남의 아이들을 조롱하면서, 그게 하느님께서 혐오하시는 조롱과 자만인줄 모릅니다. 그네들 문화가 그러하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상식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요. 그 모든 것을 걷어내라고 있는 세례입니다. 모든 계급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하느님 안에서만 존재하라는 요청이 세례입니다.

3. 그러니, 오세훈과 박형준은 그들이 쌓아놓은 거짓의 탑을 허물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돌아서지 않는 한 구원받지 못합니다. 죽어 통곡하고 한탄한들 되돌이킬 수 없는 길을 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갈 것입니다. 교회나 성당에서 세례받고 교인이 된다는 것은 하등 자신의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시선이란 무엇일까요?

4. 향유를 부은 여인이란 기사를 전달한 복음사가들은 대단히 중요한 결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준 자는 한 사람 뿐입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아 왕도 되고 사제도 되고 예언자도 됩니다. 통상 사회적 권위가 공증된 자가 기름붓는 의식을 행합니다.

5.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선포하는 기름부음은 '어느 여인'이 행합니다. 어떤 복음서에서는 "죄많은 여인'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변방에 위치한 보잘 것없는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당연히 "죄많은 여인들의 메시아"가 됩니다. 예수님 주변에 늘 여인들이 많았던 것을 이제야 이해할만 합니다.

6. 그러니, 하느님의 시선이란 가난한 이들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은 늘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 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내일 적에 보잘 것 없는 나자렛 처녀의 허락을 얻으시고, 생애의 말미에 (죄많은) 여인에게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오세훈의 어법대로라면, 예수님은 비강남 사람들을 옹호하시는 분입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의 입장과 변방에 속한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자만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보증하는 구원을 받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변방으로 가라'는 말을 거듭 새삼 강조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밖에서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7. 오세훈과 박형준 같은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진실이 부담스럽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른바 '기레기'라고 우리 사회에서 부르는 숱한 매체들이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득권에 동승하기로 마음먹은 자들은 강남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진실을 폭로하는 자를 지금도 죽입니다. 윤석열은 자신이 마치 빌라도라도 된듯 검찰권을 남용하고, 사람을 재단하며, 무고한 이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윤석열이 심문관 카야파에서 사형선고자 빌라도가 되려고 검찰총장에서 물러나 새 양복으로 갈아 입고 있습니다. 덩달아 춤을 추는 안철수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어렵습니다.

8. 오늘 아침엔 "베들레헴의 별"이라는 주황빛 찬란한 꽃이 활짝 폈습니다. 잔디꽃 사이에서 민들레도 노랗게 빛줄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앙증맞고 예쁩니다. 세례를 받는 것처럼,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모든 이해관계를 떠나 하느님만을 선택하라고 성금요일 그분께서 저희에게 다그치십니다. 용기를 내라, 내가 죽음을 이겼다! 우리의 믿음은 승리하는 사랑이라고 말합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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