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月을 찬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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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月을 찬미하며
  • 박철
  • 승인 2021.04.0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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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철
사진=박철

봄이 되면 우리는 종종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하는 엘리엇의 시 첫 구절을 떠올린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주었다.

그러면서 일년 중에 생명의 기운이 가장 힘차게 약동하는 달을 ‘잔인한 달’로 불렀던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봄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봄비는 하늘 구름에서 창공을 뚫고서 땅 깊숙한 곳까지 수직의 먼 여행을 했다. 그리고 땅속에 조용히 잠자고 있는 씨앗을 방문해서, 자신이 여행을 통해서 보았던 것을 말했다.

씨앗은 봄비의 뜻밖의 방문을 통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나는 태양과 신선한 바람과 푸른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씨앗에게는 껍질 안의 세계가 전부였다. 그곳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곳이 가장 편했다. 껍질은 그에게 자기를 가장 잘 보호해주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껍질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게 살아있을 수 있다고 굳게 믿어 왔던 씨앗에게 전해진 봄비의 이야기.

채 1밀리미터도 되지 않는 얇은 껍질을 가지고서, 씨앗은 그 추위와 많은 공격에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 대지의 어두운 세계 속을 살아왔다. 그러나 만약에 봄비가 말하는 그런 세계가 껍질 밖에 있다면 씨앗에게 생명과 같은 이 껍질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것은 지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버려야 하는 것인가?

껍질을 지켜왔기 때문에 비로소 살아올 수 있었다고 굳게 믿는 씨앗에게 껍질을 벗는 것은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껍질 안의 세계 속에서 예전처럼 편안히 살 것인가? 아니면 봄비가 말하는 껍질 밖의 세계를 보기 위해 목숨 같은 껍질을 깨는 모험을 할 것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힘겹게 이겨내고 껍질을 깨뜨린 지 얼마가 지났을까? 껍질을 열어 가면서 만나게 된 더 차갑고 더 깜깜한 세계, 그 낮선 세계가 주는 실망 속에서도 버티며, 봄비가 말한 그 무엇을 만나 보기 위해서 여린 손을 위로 더듬어 올린 지 얼마가 지났을까?

 

사진=박철
사진=박철

그 어느 날, 자신의 손에서 바람 같은 것이 느껴졌던 날이 있었다. 그날 씨앗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 자신의 고운 얼굴에 내리쏟는 햇빛을 보았고, 자신의 귀로 울려 퍼지는 만물의 합창을 들었다.

“땅속에서 편안히 머물고 싶은 씨앗이여, 너의 껍질 밖의 엄청난 세계와 우주를 볼 생각을 말라. 죽기를 두려워하는 그대여, 부활을 꿈꾸지 말라."

우리들도 하나의 씨앗과 같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가지고 산다. 그 관습의 껍질 안에 있으면 다른 것에 적응할 필요가 없어 편하다. 그 생각의 껍질 안에 있으면 다른 것을 이해하기 위한 고통이 필요 없어 살기가 쉽다. 껍질 안은 나의 세계였고, 나를 지키는 보호막이었다. 나는 그 껍질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사는 것이냐, 아니면 죽는 것이냐?

한 알의 씨앗처럼 살았던 사람이 있다. 그는 늘 이런 자세를 갖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1코린 15,31). 그는 봄비의 소리를 들었던 씨앗처럼 매일 껍질을 깨뜨리는 죽음을 통과했다. 자신의 갇힌 세계에 대해 죽고 난 그가 만난 것은 죽음이 아니었고, 오히려 더 크게 열린 세계였다. 자신의 좁은 세계를 박차고 일어선 그가 보게 된 것은 하느님 안의 더 깊고 높은 세계였다. 날마다 죽는다고 했던 그는 죽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날마다 다시 살아났다. 밖에 있는 더 큰 세계를 보면서, 또한 속에 숨겨져 있던 더 큰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그렇게 점점 더 새롭게 살아났다.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의 삶의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의 온몸이 이런 씨앗의 소리를 대변한다. 우리는 매일 잠자리에 들고 다시 일어난다. 매순간 숨을 내쉬고 들이쉬면서 산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지 않는가! 새로운 공기를 들이쉬기 위해서 내 속에 담긴 공기를 내 뿜지 않는가! 가만히 들어 보라. 우리의 신체가 그 깊은 곳에서 봄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내뿜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씨앗과 같은 우리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들은 생명이 약동하는 사월 초입에서 아직 겨울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온 세계에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봄이 왔지만, 우리들의 삶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 사월은 '잔인한 달'이다. 우리에게 금년의 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봄이 찾아왔는가?

시방 그대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뿌리로부터 나뭇가지 사이로 전해지는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자연도 시방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생명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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