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유통기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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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유통기한이 없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29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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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성경이 삶에게 말을 걸다: 슬픔]

요한복음서를 읽다보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얼마나 흠모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영원한 슬픔은 끝없는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말했지만, 그 사랑 때문에 오히려 슬픔을 가눌 길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간 첫날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또 다른 제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아마 그이는 요한일 테지요. 예수님이 사랑하셨다는 그 제자는 과연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이 한곳에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사실을 확인하고’ 이내 집으로 돌아갔다고 복음서가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이제부터는 사실이 아니라 진실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남정네들이 돌아가고서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는 요한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는 마리아 막달레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있던 머리맡에 있었던 천사가 슬픔의 연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옳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온통 예수님께 쏠려 있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분이 이 여인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름을 불러줍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 것은 베드로였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슬픔에 잠긴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그 깊은 슬픔 가운데서 예수님은 부활하십니다. 그 슬픔은 사랑이 빚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슬퍼하는 자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 가운데 사도”라고 부르고,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6년 6월 3일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념일(7월 22일)을 ‘축일’로 승격시킨 것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마리아의 사랑과 슬픔’입니다. 충분히 끝내 슬퍼할 줄 아는 능력이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하지만 모든 슬픔이 이처럼 명료한 것은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언제나 행간에서만 포착되는 슬픔이 있습니다. “죽음 언저리에서 행하는 특별한 서비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죽은 자의 집청소>(김완, 김영사, 2020)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건현장이나 고독사 현장에서 죽은 이의 유품을 정리하고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을 지우는 특수청소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프롤로그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여기에서 당신은 홀로 숨을 거두었고, 꽤 오랫동안 그대로 머물렀고, 오늘부터 나는 남겨진 흔적을 요령껏 지울 것입니다. 이제 현관문을 열고 나가 일 층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장례를 막 치르고 돌아왔을 당신의 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에게 어떤 말부터 꺼낼지 미리 생각해둬야 합니다. 자, 이제 전등을 끄겠습니다.”

그이는 착화탄을 피우고 원룸에서 죽은 어떤 여성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창문과 현관, 환풍기와 화장실 배수구까지 온갖 틈새와 구멍이란 구멍은 청록색 천면테이프로 완벽하게 틀어막고 화장실 바닥에 캠핑용 간이 화로를 놓고 착화탄을 여러 개 얹어 불을 피웠던 여인입니다. 침대 매트리스엔 검은색 눈사람처럼 맞붙은 원형 핏자국 두 개가 선명하고, 갈색 스타킹을 벗어놓은 것처럼 길쭉한 피부조직이 오그라든 채 들러붙어 있었답니다. 거울 앞에 놓인 화장품 용기 사이에 사진이 어디론가 사라진 두 개의 빈 액자가 세워져 있었고, 집안은 이미 정갈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이는 착화탄을 피어놓은 상태에서도 자살도구였던 금속 토치램프와 부탄가스 캔, 그리고 화로의 포장지와 택배상자를 분리수거함에 정리해 놓았습니다. 자살 직전의 분리수거라니!

특수청소부였던 김완 씨가 유품을 담은 봉지와 마대를 주차장으로 내릴 때 마주쳤던 이 건물 계단청소부였던 이는 망자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서른 살이나 됐을까? 착한 분이었어요. 인사성도 바르고. 맨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인데... 매년 설날과 추석엔 양말이나 식용유 세트 같은 것을 준비해서 주곤 했어요” 그녀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 죽음 앞에서 특수청소부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 착한 여인은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 억울함과 비통함이 쌓이고 쌓여도 타인에게는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고, 남에겐 화살 하나 겨누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자신을 향해 과녁을 되돌려 쏘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죽일 도구마저 끝내 분리해서 버린 그 착하고 바른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겐 돌려주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만은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 바른 마음이 날카로운 바늘이자 강박이 되어 그녀를 부단히 찔러온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읽는데, 노회찬 전 의원의 죽음이 떠올라 안타까움이 증폭됩니다. 이 착한 여인의 사정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이란 눈으로 흐르지만 목에서 올라온 것이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이의 슬픔이 눈물을 삼킨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마당에 교회법을 들먹이며 “자살은 죄”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동정 없는 세상을 교회가 그대로 재현하는 잔인한 처사입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예감했지만 예루살렘을 피해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살골을 먹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열정이 그분을 삼켜버린 사건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냉정한 세상에서 그게 착하고 바른 심성을 가진 자의 슬픔입니다.

예수는 눈물을 흘렸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세 번 눈물을 보이셨다고 전합니다. 그분은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고(요한 11,35),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셨고(루카 19,41), 겟세마니 동산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슬퍼하셨습니다.(마태 26,37) 여기서 요한복음의 울음은 그리스어로 소리 없이 우는 ‘다크뤼오’(dakryo)이며, 루카복음의 울음은 소리 내어 우는 ‘클라이오’(klaio), 그리고 마태오복음에서는 비탄에 젖어 통곡하는 ‘크라조’(krazo)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나자로의 죽음 앞에서 친구로서 인간적인 슬픔을 경험하셨습니다. 우리는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 앞에서 그렇게 울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숨죽여 흐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굳이 표현하자면, 이런 눈물은 사적 슬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두 번째 울음은 ‘강도들의 소굴’이 된 하느님의 도성을 바라보며 흘린 눈물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겪었던 슬픔이기도 합니다. 이 슬픔은 공적인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아, 누가 너를 불쌍히 여기고 누가 너를 위해 슬퍼해 주랴? 누가 너에게 돌아와 네 안부를 물으랴? 너는 나를 버렸고 ─ 주님의 말씀이다. ─ 나에게 등을 돌려 가 버렸다. 그래서 내가 손을 뻗어 너를 멸망시켰다. 나는 불쌍히 여기기에도 지쳤던 것이다. 내가 이 땅의 성문들 앞에서 키로 그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내가 내 백성에게서 자식들을 빼앗고 그들을 멸망시켰으나 그들은 제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나는 그들 가운데 과부의 수를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많게 하였다. 젊은이들의 어머니들을 치도록 한낮에 파괴자를 불러들였다. 그리하여 불안과 공포가 갑자기 그들을 덮치게 하였다. 일곱 아이를 낳은 여자는 기력이 다하여 숨을 헐떡거렸다. 그 여자의 해는 아직 낮인데도 기울었다. 그 여자는 수치스러워 낯을 붉혔다. 나는 남은 자들도 그들의 원수 앞에서 칼에 내맡기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5,5-9)

불의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자의 눈물은 사적 슬픔과 공적 슬픔이 뒤엉켜 구분하기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눈물을 보이십니다. 이것은 하느님 뜻에 따라 살고자 하는 이가 겪어야 할 결정적인 슬픔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무치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이는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슬픔으로 넘어서려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나아가신 것은 의당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럴 수 있다,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진땀을 흘리며 숙고한 끝에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태 26,46)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눈물은 그렇게 숙연한 슬픔이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처럼 사랑 때문에 슬픔을 감당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모든 슬퍼하는 이들을 위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슬픔 없이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그는 마태오복음 5,3-10의 행복선언을 빌려 <팔복>(八福)이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윤동주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과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어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예언자들은 곧 슬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란 하느님의 슬픔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3,7)고 하신 것처럼, 백성들의 슬픔이 하느님의 슬픔을 낳았고, 하느님의 슬픔이 예언자들의 슬픔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랑은 그 슬픔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 황지우 시인은 <산경>(山經)에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그러므로,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슬픔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 말했습니다. 허나,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셈입니다. 미사 때마다 성찬례를 행하며, 우리는 그분을 추모합니다. 부활절 아침을 위해 우리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주간까지 40일 넘게 사순절을 지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들입니다. 그 슬픔은 이천 년이 지났어도 가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슬픔은 하느님이 슬픔이고, 이 슬픔을 나누어 갖기로 수시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기까지 이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눈에서 눈물을 온전히 거두어 가실 때까지 그분의 슬픔은 따로 유통기한이 없습니다. 그 슬픔이 나를 다그쳐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복음을 선포케 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반그리스도 Der Anti-christ>에서 그리스도교는 “가장 천한 신분, 즉 고대세계의 하층사회”에서 발생하였으며, “가련한 자, 스스로 고난 받는 자, 죄책감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자, 영혼의 게토에 모인 사람들, 모든 실패한 자, 나쁜 길로 들어선 자, 인간쓰레기들을 설득했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는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라는 것이지요.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했지만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분명하게 간파했던 사람입니다. 그이의 생각이 옳다면, 그리스도교는 슬픔을 몸으로 겪는 이들의 종교이며, 해방을 갈망하는 노예들의 신앙입니다. 이 세상에 아직도 무고한 죽음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들의 슬픔은 유통기한이 없을 것입니다.

사순절이 다 지나고 교회가 부활절을 선포하더라도,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가를 떠나지 못한 것처럼 슬픔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21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7년째 되는 날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에 시간이 멈춰 있습니다. 7년째 그분들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사순절을 보냅니다. 몸을 가눌 수 없는 슬픔이 부활절을 접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 친구들뿐 아니라, 살아있는 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슬픔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이 슬픔의 힘으로 촛불이 일어났고, 세상은 다소 나아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슬픔은 가시지 않습니다. 잿더미 속에 묻어둔 불씨처럼 말입니다. 누군가 이 슬픔을 건드리면 다시 불길이 일어날 것입니다. 슬픔은 그렇게 슬픔을 넘어 갑니다.

 

 

*이 글은 <가톨릭평론> 31호(2021 봄)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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