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시만드로스, 정의로운 우주를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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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시만드로스, 정의로운 우주를 바라보다
  • 유대칠
  • 승인 2021.03.2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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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뜻으로 보는 철학사-3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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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헬라스 철학자들도 그리고 싯다르타도 모두 ‘나의 것’으로 당연히 믿고 있는 그 ‘당연함’을 의심했다. 깊은 지혜의 시작은 어쩌면 그 당연함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나 보다. 이 몸은 정말 나의 것일까? 대부분 너무나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태어나면서 항상 나와 함께 한 것이 바로 이 몸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당연함 속에 쉽게 잊힌 것이 있다. 바로 나란 존재 자체가 원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몸을 이루던 것은 그보다 앞서 이 세상에 있었다. ‘흙’으로 있었고, ‘물’로 있었고 ‘공기’와 ‘불’로 있었다. 지금 나의 심장으로 뛰고 있는 그 무엇은 이 몸의 한 조각이 되기 전에 무엇인가의 ‘뿌리’였을 수도 있고, 무엇인가의 ‘꽃’ 일 수도 있고, 무엇인가의 ‘눈’(眼)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어딘가의 ‘돌’이거나 어딘가의 ‘흙’이거나 어딘가의 ‘바람’이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몸 아닌 어떤 것으로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이 우주 어딘가에 말이다. 나는 너무나 당연히 이 몸 아닌 것들을 먹고 마시며 이 몸으로 그들은 잡아 놓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나의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는데 말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기원전 546?)는 탈레스와 달랐다. 탈레스는 이 우주의 근본 원리를 ‘물’이라 했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철학의 선배이며 스승인 탈레스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무규정적’이고 ‘무한한’ 것이 모든 것의 처음이며, 그 원리라고 생각했다. 흔히 아페이론(apeiron)이라 불리는 이것은 늙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영원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아페이론으로 부터 생겨 아페이론으로 소멸해 돌아간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에 크고 작은 생성과 소멸이 있어 이 우주가 변화로 가득해 보이지만, 사실 아페이론의 편에서 생각하면 전체로의 우주는 변화가 없다. 그에게서 나와 그에게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 변함없이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 아페이론으로 부터 근원적인 대립자들이 분리되어 나온다. ‘뜨거운 것’(thermon)과 ‘차가운 것’(psychron) 그리고 ‘건조한 것’(xēron)과 ‘축축한 것’(hygron)이 바로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원소인 ‘불’(pyr), ‘공기’(aēr), ‘물’(hydor) 그리고 ‘흙’(gē)이다. 그리 보면, 아페이론은 불, 공기, 물 그리고 흙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아닌 그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아페이론에서 나온 불, 공기, 물 그리고 흙은 조화롭게 있어야 한다. 조화롭게 있을 때 세상은 평화를 누린다. 있을 곳에 있을 만큼 있는 것이 조화다. 있을 곳에 넘치게 있는 것은 조화가 아니다. 물과 흙으로 이루어진 것이 조화를 어기고 물의 기운이 더 강해지거나 흙의 기운이 더 강해지면 소멸하게 된다. 죽는다. 소멸은 다시 아페이론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우주를 어떤 도덕적 질서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도덕적 질서의 기본은 조화다. 조화를 어김으로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소멸이다. 다시 아페이론으로 돌아감이다. 사람에게 그 벌은 죽음이다. 죽음은 ‘죄 값’이다. 피를 만들기 위해 사람은 물을 가져와야 했다. 숨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기를 가져와야 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선 불을 가져와야 했으며, 신체의 기본을 이루기 위해선 흙을 가져와야 했다.

허락을 구하고 가져온 것도 아니다. 고마운 마음이나 미안한 마음으로 가져온 것도 아니다. 그냥 가져다 이 몸을 이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몸 자체가 우주로부터 함부로 취한 죄의 흔적이다. 죄를 가진 존재, ‘원죄’(原罪)를 가진 존재이니 죽음으로 다시 그 몸을 우주로 돌려주는 것, 혹은 아페이론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에서 생각하면 정당한 정의의 구현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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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아낙시만드로스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과거의 지식이다. 죽음은 우주의 정의 구현이라 생각하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고, 우주가 아페이론으로 부터 나와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21세기, 지금은 아낙시만드로스의 그 시간보다 더 많이 우주를 알고 더 많이 생명을 안다. 그런 원시적 설명보다 더 많고 더 깊은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이다. 심지어 생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고 복제하는 것을 제안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이 지금 우리에게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닌 삶의 지혜로 다가온다면 여전히 그의 지혜는 살아있는 지혜가 될 수 있다. 과연 우리의 것은 얼마나 될까? 당연하다 생각하는 이 몸은 과연 우리 자신의 몸일까? 우리 자신만의 고유한 무엇이 있기는 한 것일까? 모두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냥 마구 가져다 사용한 것이다. 죽든 말든 파괴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마구 가져다 쓴 것이다. 그것으로 우린 지금의 문명을 이루며 산다. 작게는 내 몸을 이루고 살고 크게는 우리를 이루고 산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함부로 가져다 쓴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우주적 정의의 실현이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가는 우리의 삶은 항상 조심스럽고 미안해해야 한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어 살기 위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자연으로부터 가져다 써야 한단 말이다. 자연으로부터 함부로 가져다 사용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한 마음은 있어야 그 죄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몸에게 자신의 모두를 내어주는 모든 존재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고마움도 미안함도 없었기에 우린 더욱더 큰 죄를 저질렀는지 모른다. 지금 환경 재앙이란 것도 어쩌면 우리가 저지른 그 큰 죄에 대한 우주론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미안한 마음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조금이라도 덜 나쁜 존재가 되기 위해 말이다. 우주를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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