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요한 바오로 2세, 비슷하면서 사뭇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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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요한 바오로 2세, 비슷하면서 사뭇 다른
  • 한상봉
  • 승인 2016.07.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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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랑>, 리북, 한상봉 지음-13

“지금 세계 여러 지역의 민중들은 저의 보잘것없는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은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물론 당신도 내 마음을 아시겠지요. 한 사람의 혁명 전사로서 나의 가장 순수한 희망을 여기 두고 떠납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친자식처럼 받아 주었던 쿠바 민중을 두고 떠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 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든지 가서 싸워야 한다는 가장 성스러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 새로운 전장(戰場)으로 떠납니다.”

체 게바라(Che Guevara)가 1965년 쿠바를 떠나면서 피델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바티스타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1959년 쿠바 민중 혁명을 성취하였던 영웅으로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했으며, 저항 운동이 극렬한 아프리카 콩고에도 가고, 볼리비아 등지의 삼림 지대에서 다시 혁명을 하다가 살해당했다.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칭찬했다. 혁명이 갖는 파괴성을 극복하고 인간성과 공동체를 살려 내었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장관직을 수락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민중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삶 자체가 혁명이었다. 게바라는 좋은 옷이나 구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노동자들보다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특권을 갖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일을 나갈 때는 제일 먼저, 퇴근할 때는 제일 나중이었다. 일을 마치지 못해 집에 돌아갈 수 없는 날이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웅크리고 잤다. 공장에서 물을 마실 때에도 다른 이들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고,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이 쿠바 수도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 세워졌다.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무언가를 위해 죽을 각오가 없다면, 인생을 살게 해줄 무언가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과 위로부터의 종교 혁명

체 게바라의 30주기를 맞이한 이듬해인 1998년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가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체 게바라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상당히 많은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간절히 열망했다. 또한 인류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었으며, 열정적으로 생애를 불사르며 살았다.

게바라가 콰테말라·쿠바·콩고·볼리비아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혁명을 보급했듯이,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유례없이 많은 해외 순방을 통하여 가톨릭 열풍을 일으켰다. 교종은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여 연대노조를 지지하고, 결국 폴란드 공산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유럽뿐 아니라 대부분의 제3세계 나라를 순방하였는데 우리나라도 두 번씩이나 방문해서 각별한 기억을 남겼다.

체 게바라가 혁명을 통해 인간에게로 갔다면, 요한 바오로는 교회를 통해 인간에게로 가고자 했다. 게바라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을 전투적으로 살았고, 요한 바오로는 신앙과 교회 권위의 표징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큰 차이는 그들의 일상적 처지와 방문지에서의 반응이다.

혁명가는 해방구에서나 적지에서나 한결같이 거친 음식과 낡은 옷으로 떠돌면서 항상 살해당할 수 있는 위험 속에서도 정신적 자유를 만끽하였다. 그러나 교종은 바티칸 궁전과 대사관에 머물고,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환호하는 카 퍼레이드로 영접 받고 장엄 미사를 통해 한껏 권위를 세울 수 있었으나, 정치적 처신으로 그 자신은 고독했을 것이다.

명분과 실리가 서로 달랐던 쿠바와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을 성취했던 쿠바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피델 카스트로는 군복 대신에 푸른색 정장 차림으로 영접했다. 대사관으로 가는 20킬로미터에 걸친 도로변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환영을 나왔다. 이들은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평화와 희망의 메신저”라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교종에게 거는 쿠바인들의 기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당시 쿠바 정부는 환영 열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이날 오후 초등학교 학생들을 쉬게 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은 차량까지 동원해 환영 인파를 실어 날랐다. 또 정부는 방문 기간 동안 미사에 참석하는 노동자들에게 유급 휴가를 주기도 했다. 1월 25일 대규모 미사가 아바나의 성지 ‘혁명광장’에서 열렸다. 쿠바 혁명의 성자로 추앙받는 체 게바라의 대형 동상이 마주 보이는 공산당 본부 건물 앞에서 교종은 카스트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외 미사를 드렸다. 이 미사에서 교종은 종교의 자유, 인권 수호, 쿠바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런데 정작 쿠바에 필요한 것은 지난 3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에서 풀려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었다. 미국은 쿠바 혁명으로 ‘카리브 해의 진주’라는 쿠바를 잃었다. 군대를 동원하여 쿠바의 피그만을 침공하였으나, 이에 실패하고 나서 줄곧 다른 나라들과 쿠바와의 무역을 가로막아 왔다. 카스트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교종을 초청하고, 점차 종교의 자유를 확대해 왔던 것이다.

예상대로 교종은 미국의 무역 제재에 대하여 비판적 발언을 했다. 교종은 “쿠바는 세계에, 세계는 쿠바에 문을 열고 진실과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자.”고 역설하였다. “경제 봉쇄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개탄할 만한 것”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아울러 맹목적인 시장의 힘이 “가난한 나라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운다.”고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 역시 비난했다. 한편 교종은 성 라자로 성당 미사에서 쿠바의 반체제 인사들을 옹호하며 “양심수들을 사회로 재 편입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가 던진 메시지의 중심은 당연히 종교자유의 확대에 맞추어졌다.

교종은 “종교를 단지 사적 영역으로 떨어뜨리고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과 중요성을 박탈한” 체제를 비판하고, “현대 국가는 무신론이나 한 종교를 정치적 체제로 선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이메 오르테가 대주교에 의해 수십 년간 이끌어져 왔던 당시 쿠바 가톨릭교회는 결코 쿠바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내지 못했다. 폴란드 교회가 폴란드 국민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민족주의를 대표했던 것과는 양상이 달랐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해방신학의 분위기 속에서 민중 해방을 위해 투신하고 순교할 때에도 쿠바 교회는 여전히 백인 중심의 보수적 교회로 남아 있었다. 특히 쿠바 혁명 후 바티스타 군사 정권을 지지했던 교회의 소유 재산을 혁명 정부가 몰수하자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이 교회는 극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교회였는데, 사람들은 사제들이 이렇게 말하더라고 비꼬았다. “아시겠지만,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일이니 우리가 도와 줘야 하지 않겠소?” 결국 1961년까지 과반수가 넘는 사제들이 부유한 신도들을 따라서 쿠바를 떠나 마이애미로 갔다. 그러나 본래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교종은 1995년 쿠바의 오르테가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품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사실상 민중과 분리된 쿠바 교회의 체질을 바꿀 의사가 없었던 셈이고, 교종의 방문이 미국과 쿠바의 관계 개선에 결국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물론 바티칸은 공산주의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그동안 쿠바와의 국교를 유지해 왔다. 베네딕토 16세 교종도 2012년 쿠바를 방문해 우의를 다졌지만, 쿠바와 미국의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낸 것은 체 게바라와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종이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쿠바와 미국의 대표단을 바티칸에 초청해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주선했다. 결국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의장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생일인 2014년 12월 17일에 외교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한편 교종은 역대 교황으로서는 세 번째로 2015년 9월에 쿠바를 방문했다.

자본 없이, 권력 없이

한편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로서, 갈릴래아의 예수처럼 민중에 대한 연민 때문에 혁명가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처럼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저자 거리에서, 뒷골목에서, 장터에서, 성전 앞마당에서, 산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몸소 상처를 치유해 주며, 굶주림마저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리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성취한 혁명은 구체적인 민중의 요구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도 인정한 바 있지만, 쿠바는 제3세계 어느 나라보다 보건 복지 정책이 철저하게 이뤄진 나라이다. 의사 한 명이 275명의 환자를 돌볼 수 있으며, 문맹률은 0.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한 것이다. 쿠바가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바티칸의 비난을 받아왔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의 차원에서는 꾸준히 의미있는 행보를 거듭해 왔다.

1971년에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는 “사람들에게 정의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먼저 그 사람들이 보기에 정의로워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자체 내에서 발견되는 ... 행동 양식을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교회 역시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에 앞서 교회 안의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성찰해야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처신에 비추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금 반성해야만 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는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하여 이렇게 로마 황제 하드리안에게 말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과부를 돕습니다. 그들은 고아를 괴롭히려는 사람에게서 고아를 구합니다. 무언가 가진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이방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마치 친형제나 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형제란 일상적인 의미의 형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 안에 있는 형제를 뜻합니다.”

2세기 로마교회가 도시의 빈민 2만여 명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도록 이끈 것은 복음적 사랑이었다. 이 공동체는 재물을 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자발적으로 재산을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원시 공산주의는 분명히 충분한 재정을 갖지 못했지만, 복음화에 더없이 기여하였다. 그저 “자본 없이, 권력 없이”가 그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4세기에 로마인들의 법적인 위계 체제를 채택함으로써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여기서 혜택을 보게 된 것은 초대 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직 계급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국가에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돈과 권력을 제공했다. 일부 성직자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부유한 교구의 주교직을 차지하려는 선거전이 폭력으로 치닫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결국 중세기 전체에 걸쳐 원시 그리스도교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때때로 기성 교회에 반기를 든 수도원이 출현하기도 했다. 토머스 뮌쩌가 보여주었듯이, 헐벗은 농노들이 종교의 힘을 빌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복음을 교황과 군주의 권력욕을 채우는 데 이용한 교회-국가 동맹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로마 제국의 지배자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대대로 이어지고, 교회는 오로지 카이사르에게만 속하는 모습을 하느님에게 갖다 붙였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가톨릭교회의 독단을 혐오했다. 왕실과 성직자에게 짓눌려 있던 대중도 그와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테이블 위에는 신학 책보다도 커피 주전자, 찻잔, 코담배 상자, 자질구레한 장식품들이 더 많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귀족은 물론이고 성직자도 단두대로 보내졌다. 그렇다면 지금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주교관과 사제관의 풍경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음을. 오늘날 교회개혁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대로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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