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의 회심: 누구나 감사할 대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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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회심: 누구나 감사할 대상이 필요하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3.2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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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10

종교적 회심의 극적인 순간들은 늘 특별하고 놀라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대중의 관심을 끌어 왔다. 나는 종교 전기문학에 관한 폴 틸리히의 강의를 기억하는데(1957년 하바드), 그는 자신을 놀리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제가 앞으로 개종을 경험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유명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그가 다양한 ”개종들“에 관한 조사를 계속 해왔고 그 결론이 다음과 같다고 말했다, ”나는 대부분의 개종들이 점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것은 수년간의 신앙이 쌓여진 정점으로서, 마침내 그 정점에서 공적으로 어떤 종교를 받아들이는 진실성이 주어집니다.“

그때 나는 이 신학자가 진실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대해 약이 올랐다. 마치도 개인이 혼자서 예배보거나 성찰하는 것마저도 진설성이나 어떤 형식적인 표현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렸다. 그러나 그는 다만 대부분의 우리들이 갑자기 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그의 자서전과 서한과 칼럼에서 수년동안 그가 교회를 방문하고 예식에 이끌렸다는 풍부한 증거를 주었다. 이 영적인 관심들은 또한 러시아소설가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그 커다란 애정, 히브리예언자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마이크 골드 같은 유대인작가들과의 우정으로부터 형성되고 있다. 마이크 골드 같은 유대인 작가들은 유대교를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의 세상적인 의로움은 유대교로부터 위대한 영감을 얻었다. <긴 외로움>에서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종교적 갈망들, 심지어 그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입장에 있을 때와 표면적으로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의 입장에 있을 때에도 간직했던 종교적 갈망에 대해 길게 쓰고 있다.

그의 공식적인 종교생활은 192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27-28세였고 포스터 배터함과 풍요로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 내가 관습법에 의해 결혼관계를 맺은 남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며, 영국혈통이었고 생물학자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행복을 의미했던 남자”라는 제목 아래 위의 글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너무나 서로에게 행복을 느꼈으므로, 오랫동안 그들이 헤어지리라는 일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기 타말이 생기기 전에 갈등이 있었는가?(포스터는 아이들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자 그는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왜 도로시 데이 같은 여성이 무신론을 분명히 밝힌 남자, 과학이 너무나 중요하고 종교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남자를 택했을까? 물론 사랑 때문이라고, 그가 자서전에서 말하듯이,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 사랑, 그들의 긴 산보, 그리고 자연세계에 대해 그가 가르쳐 준 모든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마침내 “평화”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은 이상하게도 갈라져 있는 평화였다. 나는 행복했으나 바로 그 행복이 삶으로부터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고,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쯤 나는 의식적으로 더 많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취된 행복이 왜 그런 탐구를, 그런 숙고와 기도를 촉발시켜야 했을까? 그가 책에서 표현하듯이 왜 자연적 행복이 그로 하여금 초자연세계의 더 큰 행복과 만나기 위하여 집중적인 노력을 하도록 이끌어야 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요즈음은 심리학적인 설명들을 시도하고 있다. 파스칼이나 어거스틴 성인의 시대에는 도로시 데이가 묘사했던 행복만큼 이런 질문들이 자연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1973년 눈이 오는 2월의 어느날, 나는 이 질문들을 그에게 해보는 모험을 단행하였다. 아마도 이런 질문들이 모욕적이거나 불손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될 필요가 있다고 내가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포스터를 만났을 때 느꼈던 행복에 대해 쓴 글을 자서전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신은 의식적으로 더 많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주저하지 않으며 대답했다,

“내 경우에 기도는 단지 슬픔과 비참하고만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가라앉고 피곤하거나 걱정할 때에도 나는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꼈을 때 나는 언제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난 감사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도대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는데,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고맙다는 말을 속삭일 시간을 잠깐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감사한 것이 아니라 운명과 기회의 신에게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보통 아이들이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운의 여신 혹은 행운의 부적 혹은 내 남동생이 열쇠고리에 매달았던 작은 토끼발톱 같은 것에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때 내가 미신적이었다고, 지금도 미신적이라고 비약해서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때 감사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포스터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가 나와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나는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 그와 함께 있게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그는 나의 애정과 감사의 말을 듣게 되서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점차적인 불일치, 우리가 헤어지게된 부분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감사)는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을 했지요. 만일 한 사람이 우주에 그의 감사를 쏟아내고 싶다면,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고 그런 생각 자체가 어리석고 모호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떤 타협이 이루어지거나 단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결정할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별로 없이 그렇게 함께 살았습니다 ­ 우리의 딸이 태어날 때까지 말입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를 똑바로 계속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수개월의 대화 후, 대화나 질문을 멈추고 싶을 때 그가 눈에 띄게 그리고 날카롭게 내 어깨너머 멀리를 바라보거나, 바닥을 응시하면서 발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물건들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말을 하거나 질문을 함으로써 과감하게 주제를 바꾸기도 했다. 이제 그는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든가 질문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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