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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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 박철
  • 승인 2021.03.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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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나사렛 예수가 그 생애를 통해 가르치신 진리를 큰 산(山)에 비유한다면, 그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산에 대한 인상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믿고 알고 있는 하느님이 실제로 예수가 가르치신 그 하느님이신가?"에 대한 두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기독교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내가 믿고 의지해 온 그분이 때때로 내 앞에 너무나 낯설기만 한 것은 웬일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그분의 가르침과 행동 양식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삶을 추종한다는 것은 외적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과 결합되어 있음을 가리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그분의 인격에 내가 결속되어 나의 믿음 속에 그분이 현재적으로 나타나야 되고, 그분의 인격적인 삶에 동참함으로써 내 삶의 내용이 전적으로 변해갈 때 비로소 ‘그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간파했던 사도 바오로는 “나에게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필립 1,21)라고 했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갈라 2,20)이라고 고백했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보면 그분의 그 요구 속에 예수의 제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되는지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의 내용을 미루어 그들이 전해야 하는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가르치시던 예수는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길을 떠나는 그 제자들이 소지할 것은 지팡이 하나뿐이다. 양식이나 돈, 심지어 입을 옷이나 기타 일용품도 일체 가져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편의에 따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한 집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숙박이나 체류를 거절당하거나 그들이 가르침에 무관심하다 해도 그들을 귀찮게 굴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들의 관습대로 (발의먼지를 털어버림) 그곳을 미련 없이 떠나라고 하신다. 즉, 공연히 논쟁 같은 것으로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는 것이다.(마르 6,7-13 참조) 이러한 예수의 요구는 직접적인 예수의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의 길’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몸가짐과 일하는 방식 모두를 최대한 간소화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소유이든 정신적인 소유이든 간에 우선 소유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야 된다는 것을 예수는 강조하고 있다.

이 철저한 포기의 요구는 복음의 메시지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그분의 말씀 가운데 더욱 돋보이는 말씀으로 ‘지팡이 하나만은 가져가라’는 까닭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지팡이는 생명의 또 다른 하나의 상징이다. 구약시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의 지팡이가 그렇고, 이집트에서 억압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낸 모세의 지팡이가 그렇다. 죽은 것을 되살려 내시는 하느님의 생명에 의지하여 꿋꿋이 자기의 길을 가라는 뜻이 아닐까?

삶의 고된 언덕을 오를 때, 인생의 위험한 깊은 골짜기에서 이웃에게 모자라는 팔을 건네고 싶을 때, 우리의 팔과 다리를 연장시킬 수 있는 그 지팡이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자요 스승이신 ‘예수’ 자신이요, 그분께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겠는가? 스스로 힘을 믿는 자에게 지팡이는 오히려 짐스러운 것이나 자신의 허약함을 간파하고 있는 자에게 지팡이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의 이 파견기사는 오늘 우리 교회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선포하신 해방자 예수를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가? 아직도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족들의 진상을 촉구하는 몸부림을 외면하고 있고, 못 배우고 가난한 자들이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이 땅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드러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 세계 안에서,(로마 8,19-22 참조) 자연과 인간이 함께 그 삶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대의 벼랑 끝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 구약의 예언자와 시인들은 의인을 찾고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은 의인을 찾으려고 굳게 잠긴 우리들의 문 밖에서 외치고 계실 것이다.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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