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아무 것도 아닌 있음’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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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아무 것도 아닌 있음’을 노래하다
  • 유대칠
  • 승인 2021.03.22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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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뜻으로 보는 철학사-2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분명 나는 지금 여기 있다. 그런데 가만히 멈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움직인다. 변화한다, 그냥 공간을 이동하는 변화 정도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늙어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다. 그렇게 늙어감이란 변화의 끝에서 더 이상 이 생명을 담지 못할 만큼 늙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말 만큼이나 이 말들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렇게 있긴 있는데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며 있다. 어찌 보면 사라지며 있다.

내 생각도 변한다. 어려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20대, 나는 ‘분노’로 가득했다. 분노 가득한 나의 눈에 이 사회는 부조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러니 항상 화를 내거나 절망하기 알맞은 공간이었다. 정말 그렇게 살았다. 화를 내고 절망했다. 그리고 30대를 걸쳐 지금 40대 중반에 나는 같지만 다르다. 여전히 이 사회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항상 화를 내거나 절망을 일상으로 여기며 살진 않는다. 달라졌다. 분명 나의 마음도 달라졌다. 웃긴 이야기 같지만 과거 같으면 자장면만 먹었지만 지금은 짬뽕을 더 즐기는 편이다. 입맛도 달라졌다.

‘변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있다 또 다른 무엇이 된다는 것이다. 종종 무엇을 가지고 있다가 더 이상 그것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권력만을 추구하던 어느 정치인을 보자. 그에게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 권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한 것이다. 누리던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사라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청년이 노년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힘으로 가득하다 서서히 힘을 잃어간다. 가진 것이 서서히 약해지고 어느 순간 사라진다. 늙어가는 피부도 무력함으로 다가온다. 과거의 아름다움은 어느 순간 주름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변화하며 있는 것이다. 사라지며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시작은 변화였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있던 것이 무엇으로 있게 되었다. 원래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무엇으로 있게 되었다. 몸이란 것도 모두 다른 것을 먹어 얻은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것을 가진 셈이다. 추억이란 것도 홀로 원래 가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인연과 벗들이 준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원래 나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렇게 나의 존재 자체도 원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무엇으로 있으려 애쓰지만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하나의 작은 무엇이다. 결국 사라져갈 무엇일 뿐이다. 아무리 애써도 결국 원래 나온 그곳,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있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나’다. 원래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비워져 있던 존재가 채우고 채우려 애를 쓰지만 결국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다. 무엇으로 있으려 그렇게 애를 쓰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있음으로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 ‘우리’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원래 그것이 우리다. 원래 숨을 쉬는 것이 우리이듯이 그만큼 자연스럽게 원래 비워져있는 ‘우리’다. 원래 숨을 쉬는 것이 우리이듯이 그만큼 자연스럽게 원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이 또 ‘우리’다. 그런데 그 우리의 본 모습을 자꾸 부정하며 무엇으로 있으려 고집을 부린다. 원래 이루어지지 않을 꿈인데 말이다. 그래서 괴롭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면서 힘들어 한다.

아무리 높아 보이는 부자도 죽으면 개미 한 마리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결국 사라진다. 아무리 거룩해 보이는 종교 권력자도 죽으면 개미 한 마리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결국 사라진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정치 권력자도 죽으면 개미 한 마리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결국 사라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사라질 것도 없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있는 것이 우리의 실체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부자니 종교권력자니 정치권력자니 하는 이름들이 오히려 허상이다.

아집을 벗어나면 이 세상은 ‘자기 내어줌’의 터다. 저마다 내어주며 그렇게 어울려지는 ‘더불어 있음’의 터다. 모든 것이 서로가 서로의 까닭이 된다. 모든 있는 것이 그 태어남에서 그 죽음까지 서로가 서로의 까닭이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 있다. 서로가 서로의 덕으로 있고 서로가 서로의 덕으로 사라진다. 싯다르타(Siddhārtha Gautama, 기원전 563?-기원전 483?)가 깨우쳤다는 그 연기법(緣起法)은 그 ‘있음의 관계성’을 이야기한다.

<잡아함경>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

홀로 있는 것은 없다. 내가 있으니 너가 있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 너가 있으니 내가 있고,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 ‘있음’과 ‘없음’에서 그저 홀로 있다가 홀로 없어지는 것은 없다. ‘있음’이란 말 자체가 ‘더불어 있음’이다. 내가 ‘있음’은 곧 너가 ‘있음’과 무관하지 않단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여 있는 것이 온 우주다. 어찌 보면 나의 사라짐은 또 다른 무엇의 있음이 되기도 한다. 나의 사라짐이란 있음이 네 생명의 있음을 낳기도 한다.

작은 풀의 사라짐은 그 풀을 거름으로 자라는 어느 싹의 이유가 된다. 이렇게 작은 풀의 있음은 또 다른 생명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작은 풀의 자기 내어줌은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온 우주가 그렇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주며 내 존재가 너의 이유가 되고, 너의 존재가 나의 이유가 되며 그렇게 있다.

그런데 그저 나만 홀로 있겠다 하면 모든 것이 고통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상이다. 아집으로 가득한 나의 앞의 너는 미운 너이고, 너를 만나는 것이 고통이다. 나의 아집으로 가지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나의 앞에 놓인 사물도 나에겐 고통이다. 사랑해도 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니 사랑하는 것도 고통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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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아닌 것이 없다. 나의 아집과 이기심을 자꾸 무력하게 하니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뿐이다.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님으로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엇으로 있으려 고집부리지 않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존재 이유가 되기 위해 사라져가는 나를 그저 숨을 쉬며 사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왕자였다. 그 자리에서 내려와 아집에서 벗어난 자유를 누린 그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은은한 미소로 나를 보고 있다. 그 미소가 나를 참 편하게 안아준다. 그래 진짜 자유는 바로 저런 것이다. 아집을 벗고 모두가 더불어 있고 더불어 사라지는 우주의 순리를 따라서 잠시 이 세상 있다 사라짐 앞에 어떤 망설임도 없는 그 모습, 그 모습 속에서 그를 자유롭게 한 그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늘도 나무 아래에서 작은 미소 속 싯다르타의 자유를 돌아본다. 참 편하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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