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처럼 사랑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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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처럼 사랑하면 죽는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2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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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에는 신새벽 건너오는 바람이더니
세시에는 적막을 뒤흔드는 대숲이더니
다섯시에는 만년설봉 타오르는 햇님이더니
일곱시에는 강물 위에 어리는 들판이더니
아홉시에는 길따라 손잡은 마을이더니
열한시에는 첫눈 내린 날의 석탄불이더니
열세시에는 더운 눈물 따라 붓는 술잔이더니
열다섯시에는 기다림 끌고 가는 썰물이더니
열일곱시에는 깃발 끝에 걸리는 노을이더니
열아홉시에는 어둠 속에 떠오르는 둥근 빛이더니
스물한시에는 불바다 달려가는 만경창파이더니
스물세시에는 빛으로 누빈 솜옷이더니
스물다섯시에는 따뜻하고 따뜻하고
따뜻한 먼 나라에서
아름다운 사람 하나 잠들고 있다.

고정희 시인의 <그대의 시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사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겠지만, 그분은 당신 모습을 저희에게 쉽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고정희 시인처럼 은유로밖에 말할 수 없는 이가 그분입니다. 그분은 신새벽 건너오는 바람이거나, 적막을 뒤흔드는 대숲이거나, 첫눈 내린 날의 석탄불이거나, 더운 눈물 따라 붓는 술잔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면 먼저 복음서를 읽어야 하겠지만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방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그분을 전합니다. 서로 다른 네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제 시선으로 예수님을 읽고, 마음에 젖어드는 구절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부질없다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비우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몸을 얻고, 저희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영을 얻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몸을 알아야 예수님의 영을 입습니다.

 

사진출처=영화 [Last Days In The Desert] 스틸 컷
사진출처=영화 [Last Days In The Desert] 스틸 컷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면, 마치 내가 그 시대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그분을 상상하고, 그분의 호흡을 가능한 깊이 따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그분에게 가까이 가지 못한다면, 그분은 그저 우리에게 공경과 흠숭의 대상일 뿐 내 일상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분이 됩니다. 그분을 알기는 하지만, 믿기는 하지만, 나랑 사실상 인연이 없는 분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이기 전에 ‘연인’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몸이 그분 몸에 와서 닿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분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을 우리는 ‘영적 체험’이라고 부르는데, 영적 체험은 그분을 향한 내 사랑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정작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신 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은 얼마나 그분을 연모하고 있는지.

지금은 그분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을 수 있는 사순절입니다. 작업장에서 목수로 살았던 유용주 시인은 <가장 큰 목수>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못 박힘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목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처음 목수 일을 배울 때에는 무수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내리쳤으리라.”고 공감하며 전율합니다. 그분도 자기처럼 “으깨어진 손가락을 장갑으로 감추고” 일당 사만 오천 원을 받으며 세상의 공사판을 떠돌아 다니셨을 것이라고 가늠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루 한 편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끝까지 살았던 분이 예수님이라는 깨달음에 무릎을 칩니다. 복음서에서 어떤 예수님을 발견하든지 그 사람 마음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분께서 추상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살다가, 이유야 어쨌든 어느 날 문득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수직으로 내리꽂아 점점이 머리만 남은 못처럼 지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몸에 못을 박아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고, 제자들에게도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배고픈 사람 없고, 빚 때문에 땅을 빼앗기는 사람 없는 나라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여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요 자매인 나라입니다.

목수가 쉴 새 없이 집을 짓지만 그 집을 소유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은 평생 떠돌아 다녔지만 제 집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길에서 만난 동무들이 그분을 그리워하며 그분이 걷던 길을 마저 걷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조차 ‘내 사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다만 ‘벗’이라 부를 뿐입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성인이 되든, 현자가 되든, 전사가 되든, 하느님 안에서는 모두 벗이요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하는 연인들이 됩니다.

여성 신비가 마그데부르크의 메히틸드(Mechthild von Magdeburg)는 사랑 때문에 나는 더 순결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고, 더 거룩해진다고 말합니다.

“오 주여, 나를 강렬히 사랑해 주시고 자주 오랫동안 사랑해 주소서. 당신이 나를 더욱 자주 사랑해 줄수록, 나는 더욱 순결해집니다. 당신이 더욱 나를 강렬히 사랑해 줄수록, 나는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당신이 나를 더욱 오랫동안 사랑해 줄수록, 나는 더욱 이 땅 위에서 거룩해집니다.”

낭만주의 작가 빌헬름 쉴레겔은 “사랑받는 이의 눈에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신비주의라고 했습니다. 사랑받는 이는 사랑하는 이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는데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행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운명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그분의 죽음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이번 사순절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이참에 예수님과 맺은 저희들의 인연이 더 가까워지고, 그분을 더 깊이 응시할 수 있는 은혜를 얻어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팬데믹 상황에서 특별히 더 고통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과 배제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가능한 연대를 찾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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