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없는 비폭력 평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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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없는 비폭력 평화주의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07.18 12: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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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살리 뤼글의 <도로시 데이>-9

"도로시 데이 이전에는 가톨릭 교회에 평화주의 신학이 없었다." (에드 터너)

도로시가 일생 사는 동안 취했던 견고하고 용감하며 변하지 않는 평화주의의 입장은 그가 지닌 덕목들 중에서 가장 이해받지 못한 덕목이었으며, 2차 대전 후에는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 가톨릭일꾼운동 자체에 깊은 분열이 오기도 했다. 오늘날 이런 분열은 그 때에 비하여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가톨릭일꾼운동은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를 점점 더 뚜렷하게 채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평화주의는 모든 분파의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일꾼운동의 초기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도로시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에서 스페인 내란에 반대했으며, 그래서 거의 만장일치로 프랑코 세력을 지지했던 로마 가톨릭 동료들과 굳건한 공화주의자들인 옛 좌파 친구들 모두에게 혼란을 일으켰다. 도로시는 2차 세계대전 발발시에 “우리의 헌장은 산상수훈이다”라고 쓰면서, 가톨릭일꾼운동을 평화주의에 헌정했다. 당시에는 평화주의를 위한 신학적 지지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여전히 정당한 전쟁론에 매달려 있었으므로 도로시는 다만 복음으로부터만 자신의 입장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친구 아일린 이간이 이렇게 말한다:

❧ 초기부터, 도로시는 “평화주의”라는 단어를 대담하게 사용했다. 그는 사람들이 이 말을 이단이라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반면 나는 수년간 평화주의 대신 “복음적 비폭력”이라고 말해왔다.

피터는 평화주의에 관해 명백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중요한 원칙은 “애덕활동의 매일실천”이었다. 전쟁은 모든 애덕 실천을 거꾸로 만들어 놓았다.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대신, 지역들을 봉쇄하고 굶주린 이들이 먹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일들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그래서 피터는 평화주의라는 말을 결코 쓰지 않았으나, 나는 사실 그가 평화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피터가 폭력과 전쟁이 배제된 삶의 방식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제 도로시는 어떻게 자신의 순수한 평화주의를 얻게 되었는가? 나는 도로시가 산상수훈 바로 거기에서 평화주의를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도로시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전쟁과 관련된 노력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일꾼운동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만일 전쟁도망자들이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가톨릭일꾼에 오면 그들에겐 피난처가 주어졌다.

도로시는 죠오 자렐라와 함께 워싱턴에 가서 1941년의 병역징집령을 논의 중이었던 국회위원회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가톨릭인들에게 예외를 달라고 요청했다. 한 성직자도 위원회에 증언하고 있었다. 그 성직자는 도로시에게 무슨 권리에 대해 말하느냐고 물었다. 도로시는, “우리는 이미 사제들과 특히 수사들과 신학생들이 징집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금은 평신도들을 위하여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 시점에서 도로시는 이미 평신도 가톨릭인들을 위하여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연방정부는 로마가톨릭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기로 결정했고, 가톨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필요한 대체 복무를 할 수 있는 민간 공공복무 캠프장을 허락했다. 전통적인 평화교회의 양심적 병역거부 캠프장들은 그들이 속한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모든 가톨릭 캠프장에는 애쓰고 있는 가톨릭일꾼의 평화주의자들 밖에 없었다. 후에 팍스 크리스티의 초기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던 고든 잔은 캠프장에서 도로시를 처음으로 만났다:

❧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등록하기 전까지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하여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도로시를 처음 만난 것은 뉴햄프셔어 주의 워너 교회에 있었던 사이몬 캠프장에서였다. 우리들은 가톨릭일꾼운동으로부터 캠프장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일꾼운동이 이런 캠프장을 유지할 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가? 그래서 늘 문제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도로시에 대하여 결코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캠프장을 재정적으로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가톨릭일꾼에 대해 도로시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우리들은 도로시가 워싱턴의 정권에 더 많은 항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가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은 개인적인 시련이었을 것이다. 단지 무력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와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힘들었을 것이다.

도로시는 신화적 인물 같았다. 특히 가톨릭일꾼운동에 관한 강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서 말을 들으면 더욱 그랬고, 그가 캠프에 온다는 것은 마치도 천상에서 방문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도로시에 관해 알게 되면서 가톨릭일꾼정신으로 채워졌다. 그는 전적인 평화주의자였고, 그가 말할 때에 그런 모습이 다 드러났다. 너무나 영감을 강하게 주는 모습이었다. 나도 그의 영감에 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도로시로부터 감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수년 후, 팍스 크리스티에서 우리들은 도로시를 ‘빛을 발하는 인물’로 선정했다. 왜냐하면 도로시는 가톨릭 평화조성가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빛을 발하는, 빛나는, 이런 단어를 좋아하는데, 도로시는 그 때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 그러나 그룹 안의 어머니라기보다 그룹 위에서 빛나고 있는 어머니였다. 그는 평화운동에 말할 수 없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주위에 많은 남자들이 영향을 끼쳤지만, 그들은 도로시에게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받아 키웠다. 나는 아직도 도로시가 가톨릭일꾼운동이었고 일꾼운동은 가톨릭평화운동의 결정체이며 기원이라고 생각한다.

St. Telemachus by Ade Bethune

때때로 도로시는 사고의 자유를 존중하는 그의 자연스러운 기질과 달리, 평화주의 방향으로 일꾼운동을 조직하고 이끌려고 했다. 1940년 여름, 도로시는 전국의 모든 가톨릭일꾼공동체에 서신을 보내어, 평화주의자의 글이 실린 <가톨릭일꾼> 신문을 배포하지 않으면 일꾼운동과의 관계를 정리해야한다고 말했다. 많은 일꾼공동체들이 신문을 대량으로 취소했고 어떤 집들은 문을 닫았는데, 부분적으로는 집의 젊은 지도자들이 군대에 자원했고 또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전시경제상황으로 일꾼공동체들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서신이 전국에서 일꾼운동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다고 평하고, 또 다른 이들은 되돌아 볼 적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마지 휴는 평화주의 주제가 꽤 많이 토론의 대상이 되었던 어느 피정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 피정이 끝날 즈음에 평화주의에 관한 중요한 토론이 있었다. 피정하는 주간 내내 비가 왔는데, 마지막 날 태양이 나왔고 참으로 찬란한 모습이었다. 해가 비치니까 모든 것이 빨리 건조해졌고, 오후에 우리는 도로시가 모든 일꾼 공동체에 보냈던 편지에 관해 토론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언덕에 앉아서 논쟁하고 말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거의 모든 집의 모든 사람들이 뛰어들어 제각기 할 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편지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평화주의자들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로시를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편지가 “나의 길이 아니면 어떤 길도 없다”는 식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도로시가 그들에게 하려고 했던 것은 ‘경고’였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전쟁에 반대하면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고, 그래서 그런 상황 앞에서 그들이 취약해 질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이 도로시가 실제로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화주의에 관한 온갖 신학적 논쟁들을 전개했으며, 전국이 전쟁 문제로 붙이 붙고 있었다. 매일 밤 연설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들의 입장에 대하여 말하도록 여기저기에서 초대를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화주의 입장은 매우 복잡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방향에 대해 처음 동조한 이들은 대부분 신부들과 수녀들이었다. 그들은 도로시가 진실한 가치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도로시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비난을 받았고 브루클린 지역신문은 그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인디아나주 사우스벤드에 첫 번째 가톨릭일꾼공동체를 만들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줄리안 플레산츠는 도로시 데이가 평화주의에 관해 자신만큼 견고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말해준다:

❧ 사우스벤드 공동체는 결코 전적인 평화주의를 지지한 적이 없었고, 1940년 노틀담에 와서 말할 때에도 도로시 데이 자신은 평화주의를 강조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우리가 합류했던 일꾼운동에 평화주의가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도로시 데이가 보낸 서신이 시카고의 일꾼공동체와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나는 비전투복무에 지원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었던 다른 동료는 그것조차 지원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배달해야 할 많은 신문들이 있었으나,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내용이 신문에 있으면 그 달에 발송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도로시가 이런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도로시는 우리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후, 나는 가톨릭일꾼이 오로지 특정한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완전한 평화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다는 글을 썼다. 도로시는 이 글을 신문에 실었다.

짐 포레스트는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보다 적절한 관점을 보여준다:

❧  문제는 도로시가 사람들의 우려에 공감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도로시는 공산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무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치가 지니고 있는 사악한 측면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해도, 도로시는 관계들을 깨뜨리는 법이 결코 없었다.

도로시는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때에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내가 올바르게 기억한다면, 도로시는 가톨릭언론협회에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중립 입장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말했다. 그 후 도로시는 언론협회에 다시 가입하지 않았다. 내가 도로시에게 가입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는 협회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상처를 깊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평화주의는 도로시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가톨릭일꾼 종사자들은 도로시의 이런 관점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일꾼운동의 대모였으므로, 도로시는 실제로 일꾼운동의 모든 사람들과 다른 입장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올바른 일을 했으나, 그 당시에는 평화주의가 매우 낯선 사상이었다.

다시 한번, 나는 도로시가 지닌 거룩함이 그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할 때에 전통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주교이건 가톨릭일꾼공동체를 운영하고 있건 간에, 평화문제에 관해서는 성서의 전통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도로시는 정치적으로 평화주의자였고 삶의 방식으로는 비폭력의 결단을 했다. 프란치스꼬 수녀회의 로즈마리 린치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 도로시는 항상 가톨릭일꾼공동체들 안에 있는 비폭력의 힘과 전 세계에 정치적 평화를 가져오는데 사용되는 비폭력의 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비폭력의 문제가 다시 한번 부상했다. 이번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 보다는, 어떻게 전쟁에 대한 저항을 알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초점이 되었다. 그리고 캐톤스빌의 9명과 밀워키의 14명 같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정부 자산에 폭력을 가한 징집소 습격사건을 도로시가 지지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 그들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의견들이 달랐다. 자네트 칼빈은 도로시가 “다니엘 베리간에게 진짜로 화가 났고, 1968년 매릴랜드 주의 캐톤스빌에 있는 징집문서를 파괴한 것은 과장되고 제멋대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 두 사람은 매우 다른 유형이었으나 막역한 친구사이였으며, 서로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다니엘 베리간은 후에 토론토의 짐 로우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도로시 데이가 간디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이러한 행동지향적인 저항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저항이 잘못 악용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약간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적극적인 저항이 잘못 악용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저항의 행동이 폭력으로 변질시키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로시는 그런 점에 두려움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톰 루이스–보벨리는 캐톤스빌 사건으로 체포된 9명중의 한 사람이었다:

❧ 우리가 재판정 맨 앞에 앉아 있을 때, 윌라가 내 어깨 너머로 말했다, “누가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그러자 마치 햇빛에 둘러싸인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 도로시의 흰 머리카락과 큰 웃음이 법정에 가득찼다. 그 때 나는 도로시가 징집항의를 크게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카사 마리아 가톨릭일꾼의 설립자인 마이클 컬렌은 베트남 전쟁 후기에 징집 문서를 불태웠던 밀워키 14명중의 한사람으로서 체포된 적이 있었다. 마이클은 도로시가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당신들이 받는 고통은 당신들의 행동을 구속해준다. 행동 그 자체에는 숨겨진 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비폭력을 깨뜨리는 속성이다.”

나는 도로시의 영향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행동에 폭력의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갈등했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파괴 하려던 문서가 있는 빌딩에 들어가려면 결국 그곳에서 청소하고 있는 여인에게서 열쇠를 갈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는 내가 결코 다시 하고 싶지 않은 행위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행위 때문에 값을 지불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고통이 구원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짐 포레스트는 밀워키 14명 중의 하나였다:

❧ 캐톤스빌의 아홉 명에 대한 도로시의 첫 번째 생각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도로시는 1968년 여름인가 가을쯤에 워싱턴에서 열린 전국 전례대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었고 나에게 매우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캐톤스빌 9명의 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연계가 있었고, 그 일에 찬성 했으나, 그렇지만 그런 일을 직접하는 기회는 나에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로시의 의견은 어쨌든, 나를 격려하고 많이 부추겼다. 나도 베트남 전쟁에 대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도로시가 이러한 징집문서 파괴사건들에 대해 재고했을 때, 나는 매우 낙담했다. 그때 쯤 나는 감옥에 있었다(밀워키사건으로).

마침내 도로시는 우리들이 한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들을 잘 대해 주었고 지원해주었으며,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신문에 우리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침묵). 또한 도로시는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가져오는 최상의 길에 관한 자기생각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톰 코넬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징집문서 습격사건에 대하여 도로시는 말했다. “이런 행동은 우리의 행동과 다르다.” 그리고 왜 우리의 행동은 그들의 행동과 다른가? 그들의 행동이 불의하거나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다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비폭력이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이다. 가톨릭일꾼이 생각하는 비폭력의 정의는 ‘개방성’이라는 특징을 포함한다. 우리는 배제적이고 비밀스러운 어떤 책략을 쓰지 않는다. 그런 것은 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전쟁저항연맹 사무실이 습격을 받았고 독자명단이 그곳을 습격했던 사람들,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압수되었다. 그들은 우파 습격대였다. 아마도 파시스트들이었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성실했다. 그러나 성실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징집문서를 훔치는 것과 전쟁저항연맹 사무실에서 독자명단을 가져가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지만 이런 비교는 정확하지 않다. 전쟁저항연맹 사무실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굴 죽이거나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변명 같은 말들로 도로시 데이를 설득할 수는 없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원하지 않는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사무실을 샅샅이 뒤지는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들의 사무실을 뒤지지 말아야 한다.”

척 메타이는 비폭력에 관해 다른 접근방식을 취했던 사람들과 도로시가 겪었던 문제들을 말한다:

❧ 도로시는 법정과 감옥에서 대처하는 문제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에 항상 따뜻했고 비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는 비폭력을 실천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공권력과 대화가 가능할 때에는 항상 정중했고 열려 있었지만, 어떤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예의를 갖추고 전형적으로 거절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절차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체포되었을 때는 걷지 않았고 재판정에 판사가 들어올 때에도 일어서지 않았다. 나의 느낌은, 내 행동이 나 자신의 양심에 근거하고 있으며 법은 그런 결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히 법을 깨뜨리기 위하여 행동하지 않았으나, 그 법에 단순히 복종하기 위하여 행동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로시는 이러한 철학과 정신에 매우 공감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실천에 대해서는 자주 개인적으로 불편해 했다. 그는 경찰에 의해 떠밀리거나 끌려가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런 행동이 경찰들에게 주는 불편함이나 위험에 대해서도 의식을 했던 것 같다. 경찰들의 등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경찰들이 더 과격해지거나 화가 나지 않을까? 그런 행동이 긴장이나 갈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도로시는 비폭력을 실천할 때에 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비폭력을 존경하고 충분히 인정했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약간 갈등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도로시도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방어적인 폭력을 이해했다. 알다시피 간디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싸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싸우는 것보다는 적극적인 비폭력으로 응답하는 것이 더 좋다.” 다시 한번, 비폭력이란 물러섬이나 고립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안전을 위하여 물러서는 것도 아니다. 비폭력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이다. 세상의 매우 힘들고 갈등적인 사건들에 대해 어떤 믿음과 정신을 가져가는 것이다.

도로시의 평화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 발전했고 성숙되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도로시는 기본적으로 미국인이었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그리고 정치적 차원에서 강력하고도 일관성 있는 평화주의를 살아감으로써 그가 합류했던 미국의 가톨릭교회 획일주의자들과 달랐으며, 대신 충분히 21세기 희망의 표지가 될 수 있는 전 세계 차원의 그리스도교에 선구자가 되었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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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nifer76 2017-03-26 13:42:59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가톡릭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