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출 수 없다면 혁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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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출 수 없다면 혁명은 없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1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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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그분이 이승을 떠나신 날은 몹시 추웠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사랑하던 이들과 작별인사를 하던 날에는 서울광장에 다시 봄인가, 싶은 따뜻한 기운이 되살아나더군요. 시대의 스승이라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너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백기완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문정현 신부님의 안녕을 염려하게 됩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를만한 어른이 그리도 절박하게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두 분 모두 길 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몸으로 복음을 선포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스승이고, 그래서 전사이고, 그래서 새 길을 여는 분들입니다.

그 길 끝에서, 영결식에서 자꾸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은 누이였던 백인순 님의 인사말이었습니다. 병상에서도 아내와 쉴 새 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선생님입니다. 그 아내는 하루에 일고여덟 곡씩 노래를 불러주었고, 백기완 선생님은 ‘섬집 아기’라는 노래를 들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하는 노래입니다. 그 순정한 마음이 민중의 바다로 흘러가고, 전사의 심장에도 가서 닿았겠지요.

 

며칠 후 공지영 작가가 올린 글도 보았습니다. 집회에 나설 때는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던 백기완 선생님이 집에서는 겸손한 식사를 마치면 당연하다는 듯이 설거지를 하곤 했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평생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노고를 돕기 위해, 그는 언제나 막내딸을 둘러업고 저녁밥을 하고 내일 가져갈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다.”고 합니다. 사회적 공분과 대의에 나서는 일만큼 소박한 일상을 돌보는 마음이 지극했다는 전갈입니다. 나랏일 하신다는 운동권(출신) 꼰대들을 정작 부끄럽게 하시니 참으로 저희들의 선생님이십니다.

공지영 작가는 세상의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던 그분을 떠나보내며 “꽃이 질 때마다 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그 꽃 아래서 우리가 했던 약속을 기억하는 건 좋은 일이리라. 그 꽃 아래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하늘을 우러르던 빛나는 눈동자를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하고 말했습니다. 유난히 예술활동가들을 아꼈다는 선생님이 지은 “젊은 남녘의 춤꾼들에게 띄우는 〈묏비나리〉가 노래가 되었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그분에게는 모든 가엾은 영혼들이 “임”이었겠지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김진숙과 김용균을 기억했던 분입니다. 이제는 백기완 선생님이 살아남은 저희들의 “임”이 되어 춤추며 혁명을 하자고 부추기는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 도로테 죌레는 ‘그대 조용한 외침’이라는 부제가 달린 <신비와 저항>(이화여대출판부, 199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항이란 신비의 결과물이 아니라 신비 그 자체이다.”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실천이 둘이 아닌 것처럼, 저항이 신비가 되려면, 내 일상과 사회적 투신 자체가 춤추듯 기쁨으로 다가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백기완 선생님 표현대로 한다면 “싸우되 신명나게” 해야 합니다. 의무감에서는 신비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로테 죌레는 “세계에 대한 다른 태도를 꿈꾸지 않고, 노래 없이, 의식 없이, 춤 없이 어떠한 저항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뉴욕의 아나키스트였던 엠마 골드만(1869~1940)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들의 혁명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지금이 사순절이라고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건 없습니다. 꽃이 질 때마다 울 수는 없다지 않습니까. 이참에 일상을 살아가는 혁명가의 초상을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진출처=경향신문
사진출처=경향신문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백기완, 시인사, 1985). 소설가 김남일은 어느 잡지에서 이 책을 “요즘처럼 째째한 세상에 한번쯤 되찾아 읽어볼만한 책”이라 했습니다. 그 한 토막을 소개하는데, 백기완 선생님이 없는 돈에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우려고 딸아이 피아노를 팔면서 치른 곤혹스러움이 잘 드러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즐겁게 혁명합시다.

“얘들아, 문 좀 열어라. 벌써 이틀째구나. 갑작스러운 기습에 숨죽이는 전선의 밤처럼 이거 어디 답답해 살겠느냐? 내가 네 피아노를 팔아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방탕한 것도 아니고 사무실을 차리는데 보태 쓴 것뿐이다. 그러면 왜 아버지는 우리들과 미리 의논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일단 값이나 알아보려고 장사꾼을 불렀는데 마침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내가 자질구레하게 값을 흥정할 수도 없었다. 나도 너희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사이에 텅 빈 집구석에서 시커먼 곰 같은 것이 실려 나가는 것을 보고 너희들을 연상하였다. 입이 묏산만해질 네 어머니, 칭얼거릴 현담이 얼굴, 무능한 애비를 마구 강타하는 너희들의 항의, 몸부림.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도 모순을 느끼지 않고 있음을 강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연구소는 둘로 갈라진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모두 바쳐 싸우는 싸움터다. 여기에 피아노 하나쯤 바쳤기로서니 도대체 무엇이 어쨌단 말인가?”(<딸들아 문 좀 열어라> 중에서)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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