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나라와 믿음과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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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나라와 믿음과 종말
  • 앨버트 놀런
  • 승인 2016.07.18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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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하나의 유토피아다. 불가능한 미래의 세계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느님에게는 가능하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자기와 다른 누군가 세우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올 수 있을 뿐,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국가나 사회도, 훌륭한 영도자도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 하느님나라는 하나의 선물로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힘도 너의 힘도 아니다. 나만의 나 자신 안에서, 너만의 너 자신 안에서 방출할 수 있는 힘이다. 개인으로서의 너와 나를 초월하지만 전적으로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에 작용하는 모든 힘의 원천인 최고의 힘이다. 예수의 어록과 비유들은 바로 이 최고의 힘에 관한 것들이요, 삶에 관한 것이다. 예수가 볼 때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는 힘은 믿음이었다. 병자들이 낫고 죄인들이 죄에서 풀려난 것은 그들의 믿음 덕분이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올 수 있게 하는 것도 인간의 믿음이다.

ⓒ한상봉

예수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마르 1,15) 복음을 설교하고 제자들도 파견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온 세계에 선포되면 곧 그 나라가 임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마르 13,10)

그러나 믿음은 무슨 마력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맺고 자르는 하나의 결단이다. 자기 삶의 방향의 근본적 재정립이다. 거기에는 타협이 없으며 반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나라와 그 나라의 가치들을 삶의 기본 방향으로 삼으며 인류가 가야할 목적지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둘 중의 하나다. 신앙은 결단이다. 타협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결여이며 아무 힘도 없다.

믿음의 힘은 믿고 바라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힘이 나온다. 신앙의 힘은 진리의 힘이다. 그런데 참 믿음은 사랑 없이 있을 수 없다. 예수가 당시 사람들에게 믿게 하려던 나라는 사랑과 봉사의 나라다. 사람이 사람이기에 존중되는 인간적 형제애의 나라다. 같은 인간에게 사랑의 정을 품지 않는 사람이면 그 나라를 믿고 바랄 수 없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셨다. 하느님의 힘은 사랑의 힘이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하느님의 힘을 세상에 방출시킨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사랑이며 희망에 찬 믿음이다. 오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내일의 나라의 씨앗이다. 믿음은 작은 겨자씨 한 알처럼 보잘 것 없이 보이지만(마태 17,20), 그것이 없다면 커다란 겨자나무도 없으리라. 지극히 무력해 보이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게 할 수 있다. 현세적 가치들과 타협치 않는 믿음은 틀림없이 풍성한 결실을 거두리라.(마르 4,3-9)

예수는 그 나라가 오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인간의 불신 때문에 지연될 수 있고 파국이 먼저 올 수도 있겠지만 끝내 그 나라는 오고야 말리라. 왜?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선이 악보다 강하며 참이 거짓보다 힘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이 결국 사탄을 정복하시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나라를 믿음이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나라는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참이기에 바로 이 확신의 힘으로 그 나라는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가 곧 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마치 밤중의 도둑처럼 또는 번갯불처럼 느닷없이 하느님이 개입하시리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다.(마르 13,33-37; 마태 24,42-44)

그래서 깨어 있으라, 경계하라는 훈계가 거듭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개입이 다가왔다는 말은 본디 예수가 먼저 한 말이 아니다. 당시에 이것은 하나의 일반화된 믿음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례 없이 희망과 기대가 극렬한 상태에 있었다. 곧 무슨 변화가 일어날 참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참회의 세례를 외쳤다.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예수는 가까운 장래에 멸망이 박두했다고 믿고 있었다. 곧 다가올 사건은 파국이었다.

이 파국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때는 진리의 순간이었다. 재앙의 위협, 그것은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유일한 기회였다. 전멸이라는 위기 앞에서 예수는 즉각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호소할 절호의 기회를 보았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하리라”고, 회개하면, 진정으로 믿으면 파국대신에 그 나라가 오리라고. 이 미증유의 위기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냐 파국이냐를 선택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예수의 여러 비유의 주제다.

약은 청지기의 비유가 주는 요점은 쫄딱 망할 지경인 그가 즉각 단호한 행동을 취하여 장래의 행복을 확보한다는 것이다.(루카 16,1-8) 한 편 어리석은 부자는 큼직한 곳간을 지어놓고 모든 것을 잃고 만다.(루카 12,16-20). 사람들이 특히 지도자들이 파국을 내다보고 대처하지 못한다면, 마치 강도가 들어올 때 잠들어 있는 집주인처럼(마태 24,43), 또는 어리석게도 모래위에 집을 지어 폭풍우가 오자 집이 무너지는 변을 당하는 사람처럼(마태 7,24-27) 불의의 습격을 당하리라.

바야흐로 지금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때다. 내일이면 늦으리라. 하느님나라의 박두는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기회였다. 파국이냐 하느님나라이냐, 이것이 가까운 장래에 올 확실한 것이었다. 예수는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으니 기뻐하라가 아니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경고를 했다.(마태 4,17; 마태 3,2).

당시의 상황에서 근본적인 회개를, 파멸대신에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할 수 있을 만큼 철저한 마음의 변화만이 이스라엘이 파멸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결국 도래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파국이었다. 70년에 그리고 135년에 로마는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고 유다인들을 팔레스티나에서 추방함으로써 그 비극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대참사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하느님나라는 오고야 말 것이기에 기회는 또 있고 또 있을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예언을 그들이 처한 새로운 환경에 소박하게 적응시키고 있다. 즉 예수의 메시지는 유다민족, 팔레스티나,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언제 어떠한 상황에라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마르 13,37)라고 마르코 복음서는 말한다.

여기서 세말사건은 곧 일어날 역사적, 정치적 파국과 구별되는 하나의 초역사적 사건(마르 13,7. 10. 29)으로 변하고, 초역사적 마지막 날의 심판은 윤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사회보다는 각 개인을 향한 경고로서 사용된다. 그러나 예수가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 것은 묵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을 포함하는 예언적인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파국은 전면적이며 결정적이다. 그것은 우리시대를 끝내는 사건이다. 우리의 세말사건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삶의 근본까지 진작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가 우리 마음속에 믿음과 소망을 일깨워 여기 우리들 가운데서 하느님나라의 표징들을 보게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세말사건은 양자택일적 사건으로서, 이 시대의 완전한 인류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오늘날 하느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계신다. 우리시대의 사건과 문제들 속에서 예수는 우리가 진리 자체의 소리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지만 필경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라는 말씀이다.

(출전: <영성과 사회적 관계>, 참사람되어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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