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보다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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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보다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1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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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는다](송재소, 한길사, 2003)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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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누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김진숙이 병든 몸을 이끌고 영도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할 때, 송경동이 단식으로 쓰러질 때, 문정현 신부님이 지팡이를 들고 서서 한바탕 예언을 토하실 때, 기륭전자의 김소연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길거리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때, 책상머리를 떠나지 못하는 저는 남루합니다. 칼바람 속에서 그들은 빛나고, 안온한 방안에서 저는 시들어갑니다. 빛나는 언어를 쏟아내더라도, 몸이 빛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복음적 진실을 헤아리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뜨거운 밥 한 그릇 대접하는 게 아름다운 까닭입니다.

오늘은 묵은 책들을 꺼내 봅니다. 오래되어도 빛이 바래지 않는 언어를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을 들쳐보지 않은 게 참 오래 되었네요. 젊은 한 때 교회와 세상을 한 꺼번에 바꾸어 보자고 해방신학에 몰두한 적도 있지만, 귀농하면서 그런 책들 모두 버리고 소설이며 시를 읽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부유한 노신사의 교회’는 무신론자들에게서 구원을 얻고, 사실 신학이란 시인에게서 심장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던 때입니다. 몸이 부지런하니 마음이 깨끗해지고, 성당에서 멀어지니 신앙이 움트던 시절입니다. 어쩌다 탈농하여 다시 신학책이 책장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시집을 사는 일도 적어졌습니다.

종교보다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교리잡설(敎理雜說)보다 거룩한 시가 있습니다. 때로 교리가 잡설로 여겨지는 까닭은 진리가 아직 몸을 얻지 못한 까닭입니다. 사실상 사제들조차 믿지 않는 교설을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만약 내가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예수가 믿던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나라를 꿈꾸며, 예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교설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백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증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분이 나치를 따르는 국가교회에 저항하기 위해 몸담았던 교회가 ‘고백교회’였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동으로 고백하는’ 교회라는 뜻이겠지요.

제게 이런 생각을 불어넣어준 시인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둘만 꼽으라면 고정희와 황지우 시인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삶을 모르지만, 그분들의 언어가 가리키는 기표(記標)들을 사랑합니다. 그중에 황지우의 <파란만장>이라는 시는 그이의 간절함으로 돋보입니다.

율도국에 가고 싶다
내 흉곽의 강안(江岸)을 깎는
파란만장(派瀾万丈)
물결 하나가
수만 겹의 물결을 데리고 와서
나의 애간장 다 녹이는
조이고 쪼이는
내 몸뚱어리 빨래가 되고
오 빨래처럼
시신(屍身)으로 떠내려가도
저 율도국으로 흘러가고 싶다

파란만장한 인생사에서 “빨래처럼 떠내려가도” 율도국에 닿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어야 일상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애착을 버릴 수 있겠지요. 그래야 출가하는 새처럼,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알겠지요. 그렇게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볼 수 있겠지요. 자유로운 영혼에게 몸의 곤궁함은 그리 탓할 바가 아니라는 걸 오늘 배웠습니다.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는다>(송재소, 한길사, 2003)라는 책에서는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년?-1612년?)과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라는 옛 시인을 발견하고 자중자애(自重自愛) 합니다.

 

방랑하는 영혼, 손곡 이달

조선시대의 시인들은 대부분 본업이 학자이거나 행정관료였지만 이달은 전업시인으로 시밖에 다른 글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시적 재능 때문이며, 벼슬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양반과 관기(官妓)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재능을 인정받아 한때 한이학관(漢吏學官)이란 말단벼슬을 얻은 적도 있었지만 곧 관직을 버리고 평생 떠돌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시를 배운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사람들이 “그의 시는 귀하게 여겼지만 그 사람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달을 미워하고 질투하여 그를 더럽히고 모욕하며 형벌을 가해 끝내 죽였다 했습니다. 그러니, 이달은 평생 가난에 머물며 방랑생활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을 허균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평생 몸 붙일 곳도 없이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걸식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가난과 고생 속에서 늙었으니 이것은 실로 그의 시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곤궁하였으나 썩지 않는 시가 남아 있으니 어찌 한때의 부귀로써 이 이름을 바꾸리요.”

이달이 평생 방랑하면서 얻은 것은 시요 잃은 것은 부귀라는 뜻입니다. <김사(金沙)에게>라는 시에 그의 가난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떠돌이 신세에 가난하고 병들어
홀로 서니 만 갈래 수심이 이네.”

이런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시뿐이었습니다. <강을 따라서>를 읽어보지요.

“강변 십리 길을 굽이굽이 돌면서
꽃잎 속을 뚫고 가니 말발굽도 향기롭다
산천을 부질없이 오고간다는 말 마소
비단주머니에 새 시가 가득하다오”

고관대작 유복한 양반들이 풍치 좋은 정자에 앉아 술잔 기울이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것과는 격이 다릅니다. 그들이 시 따위로 자연을 노래하며 “세상 참 좋다”고 만족한 얼굴빛을 보일 때, 이달이 만난 세상은 가혹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보리베기 노래>에서 그의 그늘진 얼굴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공명합니다.

“농가의 젊은 아낙 저녁거리 없어서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에서 돌아오네
생나무 물에 젖어 연기 일지 않는데
문에 드니 자식들이 울면서 옷을 끄네”

물고기처럼 새처럼 자유롭게, 허균

허균
허균

이달이 놓은 다리를 더 급진적인 걸음으로 건너간 사람이 있습니다. 허균이지요. 그는 서자로 태어난 이달과 달리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들이 모두 뛰어난 명사였고, 누이인 난설헌 초희 역시 신동으로 불릴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습니다. 허균을 두고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허균은 총명함이 뛰어나 아홉 살 적에 벌써 시를 지었는데 대단히 훌륭했다. 어른들은 모두 칭찬하여 ‘이 아이가 훗날 훌륭한 문장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직 그 매형 되는 우성전만은 어린 허균이 지은 시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가 비록 글을 잘 짓는 선비가 될지는 몰라도 다른 날 반드시 허씨 집안을 뒤집어놓을 것이다’라고 했다.”

허균의 자취를 살피자면, 한마디로 “그 시대와 사귀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태생이 주류였지만, 굳이 비주류를 선택한 자였습니다. 타고난 자유분방함이 조선의 체제와 예규를 견디지 못한 것이지요. 허균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31세에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지만 기생들을 즐겨 파직당하고, 39세에 삼척 부사로 부임했다가 불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13일만에 다시 파직되고, 40세에 공주 목사로 일하다 서자들과 어울리며 성품이 경박하다고 파직되었고, 45세에 사귀던 서자들이 연루된 역모에 휘말려 죽을 뻔 했다가, 결국 50세에 반란을 계획했다는 죄로 능지처참되었습니다.

후대의 순암 안정복마저도 “균이 총명하여 문장에 능했으나 품행이 방정치 못하여 상중에도 고기를 먹고 자식을 낳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자 스스로 사류(士流)에 용납되지 못함을 알고 부처에 의탁하여 밤낮으로 불경을 외어 지옥에 떨어지는 걸 면하려 했다”고 비판했습니다만, 하지만 허균의 말을 들어보면, 그이가 얼마나 급진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됩니다. 삼척부사에서 파직당하고서, 허균은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세상과 어긋나서 죽음과 삶, 얻음과 잃음에 대해 거리낄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차차 노자, 불도의 무리를 따라 거기에 의탁하여 스스로 도피한 적이 오랜지라, 저도 모르게 젖어들어 더욱 불경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불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아득하여 정신이 팔극(八極)의 밖에 노니는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일생을 헛되게 보냈으리라 말하곤 했습니다.”

허균이 좀 더 후대에 태어났다면, 정약종처럼 틀림없이 서학(西學, 천주교)에 심취했으리라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그는 파직당한 직후에 “그대들은 그대들 법을 따라야 하고, 나는 나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련다”라는 시를 남겼다 하니,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명문대가의 자손이면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가 어떤 기득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무언가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불가 식으로 말한다면,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와 <제르미날>을 쓴 에밀 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처럼 세상을 정직하게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허균은 <본 대로 쓰다>라는 같은 제목으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를 읽어 봅니다.

“늙은 아낙 저문 날 황촌에서 눈물짓네
쑥대머리 서리 같고 누 눈은 침침하네
남편은 빚 못 갚아 감옥에 갇혀 있고
아들은 도위(都尉) 따라 서원으로 갔네
난리 겪어 집안엔 세간도 타버리고
산속 피난길에 옷가지도 다 잃었네
먹고 살 일 아득해서 살맛마저 안 나는데
관가 아전 무슨 일로 또 문을 두드리나”

그래서 허균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해와 상관없이 눈물짓는 백성의 편에서 <호민론>을 쓰게 됩니다. 이 글에서 허균은 백성들 가운데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이 있다고 합니다. 항민은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백성이고, 원민은 윗사람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백성인데, 이 항민과 원민은 위정자들이 크게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호민은 평소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항민과 원민을 규합해 크게 난리를 일으키는 백성입니다. 그러니, 위정자들은 호민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봉기하지 않도록 정치를 잘하라고 이릅니다. 그 호민 가운데 한 사람이 허균이 소설에서 다룬 홍길동입니다. 그리고 홍길동이 꿈꾸었던 평등한 나라가 율도국입니다.

 

유언비어와 혁명적 신앙

호민들이 봉기를 일으킬 때마다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 유언비어(流言蜚語)입니다. 시중에 떠도는 낭설이 관에서 발표하는 공식언어보다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혁명이 일어납니다. 유언비어가 힘을 갖는 이유는 말문이 막힌 백성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사순절이 지나면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로마에 부역하는 권세가들이 고발하고, 황제의 대리자인 총독이 사형선고를 내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어느 사내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게 부활신앙의 핵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 신앙은 다 헛것”이라 했습니다. 이게 모두 당대의 유언비어였겠지요.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빈 무덤’뿐이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지배하는 주류세력과 로마의 판결을 폐하고 처형된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라고 했습니다. 인종주의와 가부장제와 노예제를 무력화시키는 이런 발언이 초기교회에서 터져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혹자는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사상 역시 그리스도교에 원천을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는 허균이 전한 율도국의 이상과 닮았습니다.

이런 나라를 꿈꾸는 자는 허균처럼 예수님처럼 능지처참을 당할 운명이겠지만, 그들은 허균의 말마따나 삶과 죽음을 거리낌 없이 넘나들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웃는 세상을 향해 “그대들은 그대들 법을 따라야 하고, 나는 나대로 나의 삶을 살아가련다”라고 거듭 새삼 말합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시인이 되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라고 말입니다. 문득 시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남주처럼, 참된 시인은 혁명가일 수밖에 없고, 참된 혁명가는 시인일 것입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21년 3-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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