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종교적 자만과 허영심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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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종교적 자만과 허영심을 버려라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3.11 2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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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7

그날 저녁 나는 <긴 외로움>의 “탐구하는 시절”을 다시 한번 읽었다. 20대 초반 시카고에서 살았던 시절에 대한 서술이 내 관심을 끌었고, 특히 일요일에 링컨공원에서 자주 열렸던 “노동자들의 모임”에 도로시 데이가 얼마나 즐겨 참석했던가를 말해주는 다음 글이 다가왔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국적이나 같은 배경의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려고 모이는 친목 모임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천히 일어나는 어떤 격변, 운동의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어떤 꿈틀거림, 모색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안으로부터 힘과 가능성이 보이고 있었다. 레닌은 “혁명의 이론 없이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혁명의 이론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으로서 그들의 존엄성, 그들의 책임, 빵 뿐만 아니라 자유에 대한 그들의 굶주림을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때 모였던 노동자들이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이론적으로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했다. 또한 그때 그 자신도 그렇게 이론이 정리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갔다. 나는 갖고 있었던 젊은 민권운동가들의 테이프를 들었는데, 그들은 1960년대 초기의 남부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그들 자신은 또한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깨닫기 위하여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상주의는 어떤 특정한 역사적 운동과 결부되었고, 강력했지만 문제에 대하여 보다 넓은 시각, 어떤 젊은 친구가 계속해서 말한대로 “전반적인 관점”을, 또한 도로시 데이가 말했던 “혁명의 이론”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식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열중했었다.

다음날, 아침에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그 젊은 친구, 백인이고 앨라배마 출신의 그 젊은 친구가 민권운동에 참가했던 부분에 대해 그리고 지금까지 삶에 대해 경험했던 것과 앞으로 경험하고 싶은 것에 대해 들었다. 도로시 데이는 그의 이야기에서 많은 흥미를 느꼈다. 도로시 데이는 다시 시카고에서 보낸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에 무척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늘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수가 부유하고 다수가 가난한 것은 나쁘다고, 무척 나쁘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하는 것처럼 그때에는 성서를 많이 인용하지 않았지만 성서를 읽었고, 가장 정치에 관심이 많았을 때에도 또한 친구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자였을 때에도 성서를 읽었습니다. 성서는 사람들을 서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며 무슨 명예 뱃지 같은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성서를 어떤 명예스러운 뱃지 처럼 달고 다닌다는 것은 모순적인 일입니다. 나는 실제로 그런 정도보다 더 강하게 성서를 느꼈지요. 성서에 단단히 매달리고 그것을 읽지 않거나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나 가치없는 사람으로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구와 동맹자, 동지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태도는 죄받을 무엄한 태도이지요."

그는 이 말 때문에 내 얼굴에 나타나는 당황한 기색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약간의 설명을 하기로 하였다.

“가장 최악의 죄는 자만심이고 당신은 죄가 되는 종교적 자만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지요 ­ 종교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데 쓰여질 수 있는 방식을 몰랐습니다. 나는 역사를 압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증오를 저는 이제 압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싸우고,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과 모슬렘, 그리고 유대인들과 모슬렘들이 싸웁니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 삶에서, 나는 내가 가톨릭이 되기 이전에도 사람들이 성서를 읽고 기도할 시간을 갖는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더 잘 처신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온갖 아름다운 시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유약했고 또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성서를 무기로 생각하게 된 첫번째 계기는 어느날 시카고에서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는 사랑없이, 정말로 전혀 사랑이 없이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소리치고 저주하고 우리 모두에게 “이교도들”이라며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그를 불쌍하게 느꼈지요.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서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웃을지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지요. 지금 하는 것처럼 그때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그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하라고 그를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마 내 방식대로 그때 그를 위해 기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정해진 기도방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그대로 하기를 바라시는 그런 기도방식이 있을까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삶으로, 그들이 하는 일로, 나누는 우정으로, 사람들에게 주고 사람들에게서 받는 사랑의 형태로 기도하고 있다고 믿어요. 언제부터 말들이 유일하게 허용된 기도 형태가 된 것입니까?

“난 아직 생각이 끝나지 않았어요. 난 사람이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서 자기독선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더 많은 두려움과 증오를 가져오기 위하여 성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속적이라는 말과 종교적이라는 말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질문할 때 이 두 말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나도 머리로는 (이성적으로) 두 말의 차이를, 각각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경우를 볼 때에 그때에 내가 가졌던 이상주의가 세속적이었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지금 나의 이상주의가 오로지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어떤 종교적인 관심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래 살수록 나는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성서를 전혀 읽지 않으며 아마 교회에 들어오라고 설득된다면 어떻게 할지 모르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이 일하시는 것을 더 보게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상황에 있도록 돕기 위하여 자신들의 삶을 내어주고 있는 남녀들(나의 ‘급진적인 친구들’)을 내가 얼마나 경탄해 마지않는지 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영적이었는지 깨닫고 있으며 그 사실을 오래 전에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을 먹으며 우리의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알지 못했던 나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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