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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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람이 되었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3.06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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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몸푼 말씀-1

이번 주부터 <지상에 몸 푼 말씀-요한복음묵상>(한상봉, 1998, 공동선)을 연재합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고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걸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나자렛의 한 작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의 거처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었고, 이 세상을 생각해 내시고 옹호해주는 분이었고, 이 세상의 거룩한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저기 나자렛 마을에 우리 가운데 자신의 천막을 치기로 그분은 결정하셨습니다. 구름 속이나 성전 안이나 감실 속에만이 아니라 정녕 우리들 가운데 말입니다. 우리의 지붕들 사이에 자신의 지붕을 치시기로 그분은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의 화롯불 사이에 자신의 화롯불! 을 갖기로, 우리의 냄비 사이에 자신의 냄비를 걸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돈더즈, 「예수 그 낮선 분」, 분도출판사, 50쪽)

육체는 영혼의 감옥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요한은 영지주의의 이원론에 대항하여 하느님께서 온전히 인간의 살(肉)을 취하셨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태도는 세상 안에서 복음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도적 전통을 외면하고, 영적 지혜를 탐닉한 나머지 자신들의 실제적 삶을 정당화시키던 영지주의자들을 규탄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고 여겨 사도의 권위를 무시했고,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이원론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돌본다는 이유로 가난한 이들의 삶을 돌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진탕 마시고 배불리 먹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스토아학파는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이들은 육체는 저속하고, 영혼은 고결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노예는 불결하고, 철학을 논하는 귀족은 고상했다. 더구나 황제는 육체와 땅에 속한 노예들의 더러운 냄새로부터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떨어져 있는 천상적이고, 정신적인 실재인 신(神)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요한은 이제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전한다. 하느님이 살(肉)이 되었다는 엄청난 사건을 전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육체를 취하신 하느님

고대세계에서 신(神)은 왕을 뜻하며, 인간은 곧 노동하는 사람, 노예를 뜻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람, 곧 노예가 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어찌 이런 불경스런 입담이 성서로 채택되었을까! 이 부끄러운 요한의 고백을 해명하기 위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기 교회의 어느 학자는 하느님께서 실제로 육체를 취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살짝 인간의 육체를 빌려 입었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통교리는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며, 온전한 하느님이라고 밝힌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함을 부르기만 해도 죽는다고 믿었던 그 하느님이 물질이 되었고, 세상 가운데 거처를 정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해당한다. 이제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 눈으로 보고, 말씀을 경청하며, 제자들은 그분의 그림자를 뒤쫓아 밟았다.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1,2), 그에게서 모든 것이 생명을 얻고, 사람들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빛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고 요한은 증언한다.

그분은 육체를 취하셨음을 웅변하기라도 하듯이, 어려서부터 노동하셨다. 세상에서 그분의 아비는 목수였고, 그 어미는 시골 아낙네였다. 그분은 사탄에게서 이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고 유혹받으실만큼 굶주리셨으며, "술꾼이요 먹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세상에 깊이 속해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굶주린 이들이 배불리 먹는’ 행복한 나라를 꿈꾸셨으며, 타는 갈증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분은 살아 생전에 천상 세계의 행복을 논하지 않았고, 성전 사제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도 않았다. 야훼 하느님이 계시다는 거룩한 장막에 평생 들어가 본 적이 없으며, 하루의 빵을 위해 자기 손으로 노동하고, 저잣거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찾아 다니다 성전 문밖으로 쫓겨나기도 하셨다. 이때에 하느님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나도 이제 사람이 되었다!”

교회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정치는 세상에 맡겨 두고, 교회는 영혼 구제에 주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두고 교회는 어디서 구원할 영혼을 찾는가? 그 영혼과 별도로 육체만이 세상에 속하는가? 영혼의 갈증은 육체적 목마름과 전혀 상관없는 것일까? 잘려나간 손가락을 바라보며 영혼은 웃음짓는가? 예수님을 세상에 버려두고, 교회는 광야에서 예수님의 영혼만을 부르는가?

윤동주 시인은 교회당 높은 첨탑에 걸린 십자가를 보며 현기증을 느꼈다고 노래한다. 우리가 하늘을 어지럽게 바라보는 동안에, 세상 어느 한편에서 조용히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육신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땅에 내려와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1,14)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1,10) 세상의 고통과 번뇌, 기쁨과 희망에 주목하지 못하는 교회는 아직 하느님처럼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교회가 낮은 곳으로, 사람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 우리 예수님을 찾아내고 만날 도리가 없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어린 아기를 우리가 찬 서리 가을 낙엽에 덮여 강가에 버려진 사생아들 가운데서 발견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 교회는 주인을 잃은 빈 묘지와 같을 뿐이다.

요한이 그 당시 통념을 깨고 구태여 하느님을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하느님 아들됨의 영광을 보았다고 전한 까닭을 묵상해야 한다. 또한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11-12)

그리스도가 계셨던 세상과 인간, 번잡하고 복닥이는 생활, 가난과 힘겨운 나날 속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몸소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부엌냄비를 걸기로
작정하신 주님,

우리가 몸을 놀려
아이들이 지극한 밥상을 받을 때
우리도 당신처럼
따뜻한 생명을 나누기로
마음먹게 하소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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