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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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2.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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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 2021.2.17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1. 성당에 가지 않고 집에서 소일하는 산책자처럼, 재의 수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벽에 걸린 십자고상 위에는 재작년에 끼어둔 성지가지가 누렇게 변색된 채 걸려 있습니다. 당분간 이 가지를 치울 생각이 없습니다. 바삭 마른 가지처럼 제 마음도 말라있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봄이면 푸르게 물 오를 마당을 떠올립니다.

2. 사순절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백기완 선생님께서 작고하신 것은 다 이유가 있겠죠.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를 찾았을 때 주변에서 대통령에게 전하길, 백 선생님께서는 세월호 문제와 김진숙 복직 문제, 재해기업처벌법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답니다. 백 선생님은 늘 바닥에서 안타까운 목숨줄 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셨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3. 세월호 유족들과 김용균의 어머니와 세월호 유족들의 마음도 우리집 성지가지처럼 마르고 마르고 말라가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네들의 슬픔은 유통기한이 없어서 한정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고, 동정없는 세상은 고개를 돌리겠지요. 슬픔이 많은 이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사순절의 연속일 뿐입니다. 순간순간 부활처럼 그네들 손 잡아 주는 사람 있어 다행입니다. 백기완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셨죠.

4. 문득 윤동주 시인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그이의 시는 모두가 어찌 이리 슬플까요? 평론가 김응교는 <그늘>이란 에세이집에서 윤동주를 '디아스포라'라고 하더군요. 윤동주는 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에 입학했지만,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요절했습니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이었습니다.

5. 그이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단 한 권의 유고시집을 남긴 시인입니다. 그를 읽으면, 객지에서 맞이하는 스산한 계절과 교회당 첨탑에서 외롭게 피 흘리는 그리스도가 떠오릅니다. 사진을 보면, 늘 잔잔하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기쁨을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서정시가 불가능한 식민지 조선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디아스포라, 그것은 당시 조선인민들의 처지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가 태어난 간도 자체가 디아스포라였고, 고향 떠난 모든 하늘과 땅이 디아스포라였습니다.

5. 태평양전쟁이 코앞에 닥친 1941년 11월 5일에 지었다는 <별 헤는 밤>을 조금만 읽어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1]', '라이너 마리아 릴케[2]'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6.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이건 "만약에 봄이 온다면" 하는 가정형이 아닙니다. 봄은 어김없이 오리라는 믿음이지요. 사순절은 어김없이 부활절 아침을 마중나가리라는 소식이겠지요. 언젠가, 그러나 반드시 올 그날에 머리에 얹은 재를 털고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주님 앞에 서리란 희망이겠지요.

7. 윤동주는 그때까지 마냥 슬픔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슬픔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팔복>이라는 시처럼,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말입니다.

8. 재의 수요일을 보내며, 사순절을 시작하며 슬픔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 아픈 사람들과 더불어 기도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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