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나는 젊은 여성으로서 내 본능과 씨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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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나는 젊은 여성으로서 내 본능과 씨름하였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2.2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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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6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읽고 보는 것에 대해 흥분하는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도덕의 탐구자였다. 세상을 증언하고 더 경험하고 싶은 그의 열정을 키워주는 것은 책들이었다. 그의 회고담은 1960년 초반 민권운동시기에 내가 만났던 이상주의자들과 그들의 이상주의가 보여줬던 문학적 측면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그 시절에 젊은이들과 함께 그들의 삶,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리챠드 라이트, 체홉 혹은 톨스토이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때때로 그들은 문학을 옆으로 밀어놓고 델타와 그 분리주의적인 힘 혹은 앨라배마와 변화에 양보하지 않는 그곳의 반항의 현실을 강조하면서,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잔혹한 인종적 사회적 현실 앞에서 문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이 자기방종이고 무정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당시 젊은 남녀들의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문학이 명백하게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한번은 내가 미시시피 여름 프로젝트 시기 동안에 젊은이들을 인터뷰했던 테이프들을 도로시 데이와 함께 들으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약 500명의 미국 대학생들(대부분은 중상층의 백인가정 출신들인)이 투표를 위해 흑인들이 등록하도록 돕기 위해서 수개월을 일했던 프로젝트였다.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남부에서의 경험들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조금 후 다시 테이프를 들으면서 우리는 학생들의 민권운동에 대한 경험에 있어 어떤 정치적인 측면보다 도덕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도로시 데이는 이 젊은이들이 왜 그런 행동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가치 때문인가 아니면 세상적인 가치에서 연유되었는가? 아니면 도덕상의 의무일까? 모험정신? 혹은 이 모든 이유들과 어떤 색다른 동기 때문일까?

이런 질문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도록 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이 가졌던 도덕적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일까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특별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그는 남부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깜둥이들에 대한 남부 사람들의 전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 썼다. 그는 아버지가 “‘외국인들’과 ‘선동가들’을 믿지 않았으며” 자신과 여동생이 합류했던 급진적인 운동에 대해서도 불신했다고 덧붙였다.

어머니의 지평은 가정에 국한되었다. “문제가 더 발생했거나 하루를 힘들게 지내고 난 후에 어머니는 목욕을 하고 마치 저녁파티에 가는 것처럼 특별하게 옷을 입곤 했다. 어머니는 저녁식사를 요란하게 차려놓고서 여왕처럼 행동하며 마치 우리 모두를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어른들처럼 여기며 자신의 네 아이들을 대접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이런 축제 같은 식사 때 이외에, 아이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돌봐야했고 바깥 세계에 대해 생각하도록 격려받지 못했다. “이 시기는 여동생과 내가 정말 지겹게 집안 일을 해야했던 때였다!”고 도로시 데이는 기억했다.

도로시 데이는 테이프를 듣고 자신의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면서 <긴 외로움>을 썼을 때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이런 모든 상황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묻기 시작했다.

“현재의 내 모습을 어떤 계기나 사건이 만들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묻지만 나는 그때마다 무지의 침묵 속으로 물러나지요. <긴 외로움>을 썼을 때 나는 고백하고 싶었어요 ­  나는 젊은 여성으로서 내 본능과 씨름하였다고요. 당신네들(정신과 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도로시 데이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었다, “세상은 육체를 의미했고,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육체의 매력, 삶에 대한 자만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 덧붙였다, ”이 갈등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그러나 학생들이 말한 이 테이프를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이상주의가 육욕에 반대되는 것이나 자기 중심성에 대한 자기 희생으로서의 이상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어렸을때 가족생활의 결과도 아니고 그 시절에 대한 반항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상주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근본적인 본능처럼 생각됩니다.”

그는 잠시 멈추었고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쉬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삶“에 대해 물었습니다 ­ 우리는 왜 이곳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프로이드의 책을 많이 읽었고 다른 정신분석 책들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에 대해 호기심이 많으며 그 호기심이 프로이드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그들을 탐구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무엇이 마차이고 무엇이 말일까 궁금해합니다. 아마도 내가 저지른 죄를 용서받고 싶어 그러는지 모르지만, 때때로 여기 앉아서 커피를 음미하며 창문바깥을 응시하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이 모임 저 모임, 이 파티 저 파티를 뻔질나게 돌아다니던 모습, 그리고 친구들과 모여서 마시고 떠들고 부딪치고 사랑에 빠지고 이어 실망과 기쁨의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교회에 가서 이 목사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왜 그들은 목사가 되었고 그 사실 때문에 그들이 나의 아버지나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어른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일까 등등을 질문하고 대답을 찾곤 했던 모습의 일부인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되었고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주제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했지요. 아버지는 절대로 우리가 성가시게 굴 수 있는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며칠 지나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내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직 답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의견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난 그 질문을 거의 잊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마음속에 남는 질문을 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놀랐다고 생각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늘 자식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서 기다렸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 했고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아버지의 대답을 들을 수 있어요. 아버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운에 의해서, 나쁜 운이든 좋은 운이든 간에,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 운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제일 어려운 일들 중에서 어떤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은 우리가 어떤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이고, 그 기질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메시지였고 물론 나는 ‘기질’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궁금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어떤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것을 잘 하고 어떤 특정한 질문들을 잘하며 또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잘 찾고, 또 다른 사람들은 마음속에 또다른 질문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전기 기술자가 있는데 그와 말을 했을 때 사는 동안 내내 그가 전기 기술자로서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나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 주었지요!

나는 우리가 어른이 되면, 프로이드가 말했던 모든 성적에너지가 우리를 더 탐구하도록 자극하는데, 단순히 이성적인 사랑을 추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자극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직업(정신과 의사)은 그것을 승화라고 부르지만 나는 승화라는 개념이 우리의 모든 호기심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내 말은, 우리가 질문을 하도록 태어났고 그래서 대답도 얻도록 태어났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추구하고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승화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자기승화 둘 다 믿지요.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대화로 인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정신적 체조의 과정을 겪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분명히 하느님은 이곳에서 우리가 성생활을 즐기도록 해 주십니다. 그분은 이곳에서 우리가 질문하고, 우리이웃과 함께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도록 해 주십니다. 물론 당신은 묻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건 비극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무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 생애동안 그는 <긴 외로움>에서 말했던 육체에 대한 매력 이외에 또 다른 “갈등”과 투쟁하였다. 나는 1970년 3월의 긴 대화를 기억한다. 그 날은 아주 춥고 바람부는 날이었다. 오후의 햇살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는 맑시즘, 그린위치 빌리지의 지적인 생활, 프로이드와 파블로브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심취하였던 시절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성향이나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과 그것들을 이해하는 또다른 방식 사이에 느꼈던 긴장에 대해서 말했다.

“아마도 당신은 (나는 확실히 그렇지만) 이상주의가 어떤 것의 결과, 즉 어떤 사람에게 얼마동안의 시기에 일어났던 것의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이상주의가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가 받는 어떤 영감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상주의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그 선물을 귀중하게 여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선물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선물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도 잊습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세상의, 세속적인 이상주의라고 말하지만 나는 세상의 이상주의와 하느님을 섬기는 이상주의 사이에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그분께 대한 우리의 예배를 너무나 질투하기 때문에 그분의 목적과 그분의 선함을 섬기는 사람들을 따로 분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거나 성서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그래서 확신을 갖게 된 사람들과 책들, 심지어 무신론자가 쓴 책들까지 읽고 감동을 받았으며 혹은 사는 동안 공평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절대로 교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사람들을 하느님이 구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멈춤, 꽤 오랫동안의 멈춤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어떤 특정한 세계의 이념적인 한계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에(내 애덕의 부족, 나의 냉소적인 기질), 나는 문제를 그냥 이 정도로 끝낼 수가 없었다. 나는 침묵의 진실이라는 마술을 깼다. 나는 그의 폭넓은 도덕적 감수성을 있는 그대로 또한 타인에 대한 넓은 포용을 확대시킨 그의 사랑스러운 친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난 그가 이미 말했던 것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느끼는 것처럼 항상 그렇게 느끼지는 않았지요?”

나는 이런 나의 말에 스스로 놀라서, 더듬거리며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 “내 말은, 우리가 젊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지요 ­ 우리들 대부분이 보통 그렇다고 생각하는 데요.” 내 눈은 어둡고 먼지가 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지나쳐서 계속 하늘을 쳐다보며 약간 몽상에 잠긴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달랐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자신의 희망과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당신과 내가 지금 방에 앉아서 서로의 믿음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방에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아, 우리는 이런 믿음들을 갖고 있었지만 아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지 않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나는 강력한 우리나라 같은 나라에 도전하려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에 계속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지나간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아마 우리들이 그 때에 편협했을 것이라고 깨닫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보았을 따름이고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안경을 걸쳐보려고 애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시절의 우리 모습을 일깨워주는 당신이 옳아요. 정말 우리는 얼마나 조급한 진리의 탐구자들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행복했었고 활기가 넘쳤어요. 우리는 신문을 꼼꼼하게 읽었고 깨어 있었지요. ­우리는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고 깨어있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온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어 있고 싶었지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이겠지만, 그때 우리는 정말로 다른 경제체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우리나라의 정치는 어떤지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미국이 참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며 그 변화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갑작스레 멈추었고 나는 더 이상 묻거나 말할 것이 없었다. 옆 식탁에 차가 있었는데, 그는 조금씩 마시기에 충분히 식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우리는 그저 차에 대해서, 차가 얼마나 여러 종류이고 커피도 그렇다는 얘기며 그가 커피를 얼마나 늘 애호해 왔는가에 대해서 가볍게 얘기를 나눴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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