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나는 이상주의자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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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나는 이상주의자 청년이었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2.1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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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5

지난 반세기가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남녀들이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며, 사회문제에 대한 이 운동의 원칙과 접근방식은 운동자체에 대해 진지한 연구를 하도록 정당화시켰고,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에 충분한 운동으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운동으로 간주되어왔다.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 모두가 전통적이고 명확한 개념의 차원에서 가톨릭인이거나 그리스도인 혹은 종교인이라고 고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꽤 많은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이 환대의 집에 왔고 시간을 그곳에 바쳤다.

환대의 집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구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들이다. 가슴속에 이상주의의 격동을 느끼는 수많은 젊은 남녀들은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한다. 어떤 회의주의자는 그들이 단단하지 못하다고 말도 하지만 사람들이 성서적인 의미에서 애덕의 기회를 찾는 것, 그것도 생색내는 듯한 태도를 갖지 않고 애덕의 기회를 찾는 일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환대의 집에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주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애덕행위, 관료행정과 자만심의 중재가 없는 직접성이 있다.

가톨릭일꾼 전통의 지적인 측면은 도덕적 탐구에 대한 관심과 함께 철학자들, 작가들 그리고 역사가들의 작업을 자신들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해 매우 노력하는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피터 모린 자신이 수백 명의 프랑스 남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이상적 청년운동에 참여했었다. 도로시 데이는 그의 사회행동주의를 일리노이대학교 교정에서 시작하였고 수년동안 그가 해야하는 일의 한계 안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젊은이들이 초대할 때에 그들과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을 중지한 적이 결코 없었고, 그들의 질문에 응답하였으며 그들의 굶주림과 갈증을 잘 이해하였다. 그는 힘겹게 애써서 얻은 신앙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의문에 대한 이같이 열린 자세는 그가 매우 노력해서 얻은 결과였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얘기를 할 때에 나는 자주 매순간 그의 깊은 신앙을 느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대학생이었고 젊은 여성으로 문학적 영감과 정치사상으로 가득 차서 맨해튼에 살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을 때, 우리는 점점 더 이상주의와 그것의 속성, 그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하여 일반적인 토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다른 때에 그는 이런 식의 토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이곳에 오면”,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관심에 감사를 표현합니다. 나는 무료급식을 기다리며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려고 애쓰는 젊은이들, 그들과 함께 스프와 커피를 마시려고 앉아있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학생들은 많은 것을 알고있지만 아직도 그들은 배우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에게도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눌 것이 많습니다. 주고받는 것은 단지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집을 떠나 울바나에 오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도 약속된 땅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자유로웠으며, ‘마침내 자유’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나는 킹박사가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수많은 백인청년들이 민권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흑인들이 알고있는 것에 대해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인 불행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가족의 소용돌이가 젊은이들로 하여금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아마 때때로 그럴지 모르지만 ­ 그러나 나는 문제가 많은 집으로부터 오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킹 박사의 민권운동이나 가톨릭일꾼운동에 확실히 참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아무리 그들의 환경이 운이 좋다해도 수많은 아동들이 그들의 의식 속에 발전시키고 또 어느 정도까지 유지하고 있는 불의 혹은 불평등, 부당함에 대한 자각을 말하고 있었다. 민권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전반적인 인종적 편견과 매일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예를 들면 부모나 교사가 “선호적 태도를 보이는” 사건들­ 사이에 분명히 어떤 연결점을 인식했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인종 편견이 비슷한 시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한 국가가 어떤 국민들에 대하여 가정이나 학교에서와 비슷하게 편견을 가질 수 있거나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넘어 그 이상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며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보다 자기 그 이상을 보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계 속에 갇힙니다. 그들은 그저 편안하게 숨을 쉬고 밤에 잠드는 데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뛰고 현상유지를 하는 것만으로도 매일 매일의 짐에 허덕입니다. 지식인들에게 그 사실을 일러주는 것도 힘들고, 노동자들의 삶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도 힘듭니다. 피터는 반복해서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매우 특별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나에게 말하곤 했습니다(그는 늘 매우 정중하고 존경을 표하며 말했습니다). 그는 작가들과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겪는 것처럼 ‘떠밀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에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도록 돈을 받습니다. 그래요, 우리도 역시 살기 위해 애써야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경우와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재는 공장에서처럼 그렇게 직접적으로 일하지 않으며, 삶에서 조금 더 여유가 있고 숨쉴 공간이 더 넓습니다.

“대학에 있을 때 그리고 뉴욕에 살았을 때 ­피터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멈춰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에 대해 궁금해했으며,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만일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사는 대로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어떤 것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학생으로서 꽤 열심히 일해야 했습니다. 나에게는 황금냄비가 없었으니까요. 학교에 머물기 위해서는 나를 꽤 열심히 움직여야 했지요, 그리고 학교를 떠나 뉴욕에 살게되고 다음에 시카고에 갔을 때에도 나는 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했든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는 늘 매일 어떤 사람을 골라서 응시하곤 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하루 하루를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이상주의란, 그것 자체를 표현하려는 선함과 함께 호기심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이웃에게서 보게되는 당신 자신의 고통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그의 부드러운 항변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기심이라는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상주의와 관련해서 보통 토론할 때 말하는 이상주의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이상주의는 집을 떠나 대학으로 가기 전에 꽤 분명했는데, 그것은 조숙하고 예언적이었으며 마음속의 방랑벽으로 세상을 보고 열심히 늘 읽고자 하는 갈망과 연결되어있는 이상주의였다.

 

1912년 15살밖에 안되었을 때 썼던 편지, 자서전 <긴 외로움>에 길게 인용되어있는 편지를 보면 그는 1952년 이 자서전이 발간되었을 때 세상이 알게 된 도로시 데이와 다른 점이 별로 없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테니슨의 글을 인용하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것을 말하며 하느님에 대해 되풀이 말한다(“매일은 하느님께 속하고 매일 우리들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며 그분을 섬겨야 한다”), 비록 그는 “죄와 어렵고 쓰라린 투쟁을 한 후에야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후에야 비로소 축복 받는 즐거움과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서전에서 그는 중년기의 삶이라는 떨어진 거리로부터 자신의 젊은 자아로 즉각 돌아선다. “15살에 쓰여진 이 편지는 과시와 허영과 신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나에게 가장 흥미 있는 것, 육체와 정신의 갈등에 대해 쓰고 있었으나 자의식에 가득차 쓰고 있었으며 마치 문학가가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문학적인 소질이 있었고 성공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세상에 대해서도 바쁘게 움직였다. 열광적인 독서를 통해서 세상을 조사하고 있었으며 문학적인 상상과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을 읽었을 때, 나는 공원이나 호수(시카고 안의)로 가는 대신 웨스트 사이드로 긴 산보를 시작했다. 나는 남동생을 유모차에 태우고 밀면서, 자주 여동생과 나란히 서서 수 마일씩 걷곤 했다. 여동생도 보통 유모차를 끌곤 했다. 우리는 발이 아플 때까지 걸었고, 끝이 없는 회색 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길들의 똑같은 모양새에 매혹되었고 선술집을 지나쳤다. 그곳에서 나는 싱클레어의 이야기에 나오는 폴란드 결혼잔치의 장면들을 떠올렸는데, 길 높이보다 완전히 한층 낮게 위치한 집들이 여러 구역에 이어져 있었다."

도로시 데이에게 “예술” 과 “삶”사이의 연결은 실제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매일의 행동에 끼쳤다. 이상주의란 결국 문자 그대로 이상의 추구이며 보통은 머리로 하지만 때때로 온 몸을 다해서 추구하기도 한다. 사회주의자 대학생이나 뉴욕의 방랑자로서 정치적인 급진파들과 어울리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복지를 위하여 삶을 바칠 준비가 되었던 가톨릭 개종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도로시 데이는 책에 담긴 도덕적 메시지를 따라가느라고 바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이 검열을 통과했는지 결정하려고 애썼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를 잠들게 놔두지 않았다. 테니슨은 그를 낭만적인 고뇌로 흔들리게 했다. 성서의 구절들이 마치 그를 위해 있었던 것처럼 솟아올랐다.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너희들은 그러므로 완전하게 되어라’ 라고 명하겠는가.”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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