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없이 예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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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없이 예수 없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2.0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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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 2021.2.2.

1. 복음서를 읽다보면 세례자 요한에 대한 참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는 한편에선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고, 한편에선 그 요한을 깎아내립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한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전율하곤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4-28)

2. 예수는 요한을 두고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예언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는 말이지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요한을 "마지막 예언자"라는 표현까지 씁니다. 예언의 종결자라는 뜻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저자들은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예언서를 가장 많이 언급하지만, 정작 예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이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실상 예수에 앞서 요한이 먼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설교 주제 가운데 핵심인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 말한다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에게 "살아있는 선지식(善知識)"인 셈입니다.

3. 뒤따라 오는 구절은 요한의, 그러니까 예언자의 신원을 알려준다. 예언자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는 예수의 전갈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일꾼이고, 일꾼이 주인보다 클 수 없고, 손님보다 클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서 아빠, 아버지의 잔치에 참석할 이들을 초대하러 가고, 종당에 이들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일꾼들이다. 요한은 하느님의 뜻을 존하며 만인을 그 나라로 초대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만인을 그 나라로 초대하였다. 잔치를 거절하는 이들은 하늘도 어쩔 수 없다. 복음서에서는 창녀와 세리, 세리들이 이 잔치에 참석하리라 전한다. 하느님 나라의 일꾼들은 이들을 초대하고, 또 시중드는 사람들이다.

4. 요한복음서는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를 드높이기 위해 요한을 깍아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요한의 입을 빌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5. 민중신학에서는 "예수는 곧 민중"이라고 읽습니다. 예수가 민중이 겪는 고통과 희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한결같이 예수가 평생 "가난" 안에 머물렀다고 전합니다. 루카는 예수가 짐승들의 거처에서 짐승의 밥처럼 구유 위에서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천대받던 목자들에게 그분을 경배하라고 이릅니다. 그분의 탄생은 짐승처럼 노예처럼 살던 천민에게서 하느님이 나셨다는 놀라운 축복을 전하는 것이지요.

마태오는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국가권력의 살해위협을 받았고, 결국 외국으로 망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의 가족들은 에집트에서 난민으로,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이주아동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처럼 빈민들에게 가슴벅찬 신앙고백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르코가 복음서의 시작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에 가장 흔한 이름가운데 하나였고, 예수의 마지막 순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등장하는 바라빠의 이름도 본래 "예수 바라빠"입니다.

6. 예수를 민중으로 읽는다면, 이렇지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민중이 예언자보다 더 크다.
-예언자는 가난한 민중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7. 그래서 예수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이방인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고, 가난한 백성들을 제대로 끝까지 온전하게 섬기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마저 바쳤습니다. 당신의 피와 살을 발라 줄 정도로 그분의 섬김은 진정성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일러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이상의 존칭이 있다면, 뭐든 붙여주고 싶어집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드님이고, 하느님의 얘인이며, 하느님의 사랑받이이며, 어쩌면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8.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예수는 민중이면서 예언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향한 여정에서 그분의 처지가 구원을 요청하고, 그분의 발언이 구원을 가져옵니다. 우리도 예수처럼 구원의 대상이면서 구원의 주체입니다. 방법은 서로 조금씩 달랐지만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한몸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세례를 통해 저희와 한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이 사라진 그리스도인은 그분들과 인연이 없습니다. 예언자가 박해받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9. 정양모 신부님은 <교회개혁 8개조> 2항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인권유린을 질타하는 예언자 정신이 우리교회에 시퍼렇게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자 반열에 속하는 예수는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빠를 깊이 의식한 나머지 압제에 짓눌려 신음하는 소외된 자들을 편애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참 그리스도인과 참 그리스도교회라면 힘있는 사람들과 야합하는 자세를 버리고 힘없는 이들 편에 서는 예언자적 자세를 취할 일이다" 하고 말합니다.

10.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언론에 자주 등장하면서 얻는 착시효과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전과 다르게 '진보적' 태도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복음 앞에선 너무나 사소하고 진작에 행해야 할 것을 이제야 하면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명동밥집'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제라도 복음의 한끝이라도 잡았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치 한국교회가 전면적으로 개혁되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는 대의명분을 살아내는 것처럼 세상에 비출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교회에 대한 제 현실판단입니다.

11. 우리는 지난 교회 역사에서 빈민구제가 사업이 되는 걸 얼마든지 보아 왔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이 비지니스가 될까봐 염려합니다. 교구 차원에서, 본당 차원에서, 무엇보다 주교와 사제들의 생활방식에서 "가난"이 묻어나오지 않는데 무슨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입니까? 그들의 자선이 그들의 허위의식을 덮어버릴까 걱정됩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궁금하면 주교관이나 사제관을 들여다 보시면 됩니다. (물론 모든 주교와 사제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항시 어느 그룹에나 하느님의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죠)

12. 우리 교회가 주의할 것은 "자선의 관료화"입니다. 공무원처럼 노숙인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몇 명 해치웠다는 식의 물량주의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굳이 장일순 선생을 언급한다면 "그들이 바로 하느님임을" 담당자들이 알아채기를 기대합니다. 예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취미가 주말마다 골프를 치거나 캠핑카를 몰고 다니는 것이라는 사회복지관 관장 신부의 고백은 우리 교회의 사제들이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상 위계를 거스르는 평신도들을 윽박지르는 관행이 왜 교회에서 문제되지 않는지 알게 됩니다.

13.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7-28)

이 구절은 이렇게 고쳐 읽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사제들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4.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들보다 평신도들이 먼저 들어갈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고 평신도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손님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고관대작들과 판사와 검사와 의사와 박사들보다 차별과 배제로 고통받지만, 제 힘으로 밥을 벌고, 가난한 사랑에 기뻐하는 이들이 먼저 들어갈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먼저 첫사랑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나누어 가진 자들은 요한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처럼 '나'를 버리고 하느님 아빠를 현양해야 합니다. 관료주의는 우리 교회의 가장 오랜 숙적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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