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피터 모린을 만나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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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피터 모린을 만나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하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2.0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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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4

도로시 데이는 뉴욕의 유니온 광장에서 가난에 찌들고 무력한 소수의 사람들이 식량과 일할 기회, 시민으로서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하여 호소하고 있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워싱턴으로 행진하는 중에 1932년 12월 8일, 워싱톤 가톨릭대학교에 있는 성모 무염시태 대성당으로 가서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서 기도했다. 그의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뉴욕시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피터 모린을 발견하였다. 그때 <공공복리>의 편집인이었던 죠지 셔스터가 피터 모린을 알게 되었는데, 물론 그는 그의 잡지에 기고하고 있었던 도로시 데이를 오랫동안 칭찬해 왔었다. 그는 두 사람의 유사점을 알아차렸고 행동가로서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려는 의지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모린은 셔스터의 제안을 곧 받아들였고, 도로시 데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며칠, 이어 몇 주일, 몇달 동안 두 사람은 이야기를 했고, 미국의 현재 우울한 광경을 더 나은 것으로 바꾸기 위하여 각자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궁리를 계속했다. 도로시는 점점 피터를, 그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맞춰서 함께 일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그는 또한 피터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알게되었다. 피터는 프랑스 농촌의 가톨릭 대가족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 세례자 요한 드 라살 형제회의 회원이 되었다. 이 그룹은 결코 사제가 되지 않고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며 명예와 특권을 포기하기로,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남자들의 그룹이었다. 그는 1895년에 첫 연례서원을 하였고 교사가 되기 위하여 공부했다.

피터 모린, 사회개혁적 가톨릭운동을 궁리하다

그는 파리로 보내졌는데, 점차적으로 시용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시용 운동은 개혁파 가톨릭의 움직임으로 1891년 5월 15일에 반포된 교종 레오 13세의 기념비적인 회칙, <레룸 노바룸>(새로운 사태, 노동헌장)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영적인 쇄신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었다. <노동헌장>에서 교종 레오 13세는 부유하고 세력 있는 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가진 것을 더 나누는 사회정의를 요청하였다.

피터 모린은 시용 운동의 평화주의를 받아들였다. 이 평화주의는 예수가 추종자들에게 제시하였던 메시지였다. 그래서 피터 모린은 군 복역의 의무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스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1909년 캐나다로 갔다. 그때 그는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농원, 공장, 작업소 그리고 상호원조>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책은 공동농장과 작은 수공예 작업소의 영적, 구원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었다.

크로포트킨은 그가 살고있던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가치에 대해 별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았다. 피터 모린은 작은 공동체에서 가족들이 다시 한번 식량, 의복과 집들을 만들며,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들에 대한 자신들의 가치와 통솔을 다시 회복하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크로포트킨이나 톨스토이가 가졌던 유토피아적인 비전이었고, 이들은 또한 젊은 프랑스 유배자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캐나다에 도착하자 그는 알베르타의 밀 농업지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한 친구와 자작농을 하려고 했으나, 친구가 사고로 죽는 바람에 떠돌이가 되었다. 그는 도랑을 파고, 수확을 하고,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막노동 일을 하며 광산에서 일하고 화물차를 타고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방랑자의 생활을 보냈다.

1925년 그는 뉴욕으로 와서 그후부터 수년간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도덕철학, 종교, 사회학 그리고 경제학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그는 또한 “쉬운 글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짧고 강력한 글들로서 각각의 글은 특정한 사회문제의 속성을 말하고 다음에는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정신 속에서 그 문제에 대해 직접적이며 실천적인 응답을 제시하려는 방식으로 쓰여졌다.

도로시 데이를 만났을 즈음에 이 짧은 글들은 독특한 나름대로의 예술적 형태가 되어 있었다. 각각의 글은 짧은 문장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때때로 강조를 위해 반복되기도 했는데, 이 반복들도 상세한 설명을 동반하였다. 피터 모린은 문장들을 시의 절 형태로 배치했는데, 몇 개의 단어 혹은 절을 한 줄에 놓고 문장의 끝은 다음 줄에 놓았으며, 때때로 운을 맞추었고 혹은 날카로운 직유와 은유법을 쓰기도 했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의 “정신과 생각들”이 그의 전 삶에 있어 절대적으로 기본이었다고 수 차례 분명히 말했다. 그는 예수의 원칙들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육화 시키려고, 또한 예수를 일요일 날 편리하게 쳐다보는 그림쯤으로 변질시켰던 사람들에게서 구해내려고 애쓰는 피터에게 영감을 받았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그들이 함께 시작한 운동이 되었다.

 

가톨릭일꾼운동

신문이 먼저 시작되었다. 그들은 둘다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1933년 5월 두 사람은 2500부의 가톨릭 일꾼신문을 준비했다. 그들은 사무실을 열지 않았고, 직원도 고용하지 않았으며 확보된 독자명단도, 혹은 정확하게 짜여진 홍보 계획안도 없었다. 그들은 두 사제와 수녀 한 사람의 도움과 거의 비어있는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57달러를 모았고, 인쇄기의 도움으로 도로시 데이가 후에 설명한 것처럼 “<국가>와 같은 작은 8페이지 짜리”의 신문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나서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가 있었는데 맨해튼 아랫동네 동쪽구역으로부터 유니온 광장까지 긴 행진을 하였고, 유니온 광장에서 그곳에 모여 신문을 나눠주고 있었던 정치그룹과 합류하였다. 그곳에 모인 많은 구경꾼들은 “가톨릭”과 “일꾼(노동자)”이라는 말이 나란히 놓인 것을 보고 파격적인 느낌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로시 데이가 말했던 것처럼, “나머지 이야기는 역사였다.” 그는 역사의 의미를 분명하게 즉각적으로 밝히면서 과장하지 않았다. “ ‘역사’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가톨릭일꾼 가족에 속했던 우리 모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한 가족이 이 나라의 온 도시들과 온 주들에 퍼져나갔던 것, 그것이 바로 일어났던 일이며 우리의 모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수년 후 <가톨릭일꾼> 신문은 15만 부 넘게 발간되었으며 아마 이 숫자보다 더 많은 독자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지는 신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월간 신문이고 오늘날까지 “한 부에 1페니”로 팔리고 있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단순히 가톨릭 교회가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말해야 할 바를 쓰고, 그들의 도덕적 정치적 철학을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작업”의 중요성을 믿었다. 함께 그들은 환대의 집들을 만들었는데 이 환대의 집은 이후로 아무 곳도 갈데가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며 사회와 종교단체가 주는 자선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아메리카 사회를 보여주는 한 장(場)이 되었다.

피터 모린은 호스피스라는 오래된 개념을 20세기의 개념으로 바꾸었다. 즉 “애덕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사람 대 사람이 직접 만나고, 복지국가의 얼굴 없는 관료적인 절차를 반대하는 개념이었다. 그는 이 비전을 도로시 데이와 나누었다. 그들은 함께 그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가게, 아파트를 세내고 빵과 버터를 사고 옷을 얻어서 나누고 가능할 때에는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앉아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정과 사랑을 나누려고 희망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도우려고 합세했으며 전국에 “30여개의 환대의 집들”이 생겨났다. 지난 수년간 더 많은 환대의 집들이 시작되었고, 닫았으며 때때로 다시 열기도 하였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농업의 정치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였다. 식량을 증가시킨다는 명백한 목표를 넘어 농업은 또한 산업주의가 야기한 소외에 대한 해독제 역할을 한다. 소외는 우리를 삶의 핵심으로부터 갈라놓으며 삶 전체를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보내도록 만든다. 가톨릭일꾼 가족이 된 많은 사람들이 뉴잉글랜드지방과 뉴욕주, 아팔라치아 산맥지역, 중서부 그리고 태평양 연안지역에 농장을 세웠다. 친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이들 농장에서 행동의 중심을 이루고 살았다. 그곳에는 정해진 규칙이나 직무가 다러ㅗ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자발성에 기초한 이 운동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의 수천 남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라는 두 가톨릭 평신자들의 모범과 결단에 응답해 왔다.

 

일꾼들과 함께 한 생애

1933년 5월 1일 노동절로부터 1980년 11월 29일에 죽을 때까지 도로시 데이는 중단 없이 가톨릭일꾼으로 살았다. 그는 <가톨릭일꾼> 신문을 편집했고 같은 이름의 환대의 집에서 살았으며 버스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면서 가르치고 말하고 음식을 마련하는 것을 돕고 나머지 우리들이 보통 부랑자 노숙자 주정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는 또한 계속 기도하였고, 헌신적인 행동을 하고 그가 사랑하는 책들을 읽고 또 읽었으며 <가톨릭일꾼> 신문의 “순례의 길에서”라는 고정 칼럼에 글을 썼다. 타말은 그의 곁에서 커서 떠났으며 결혼을 하여 그의 어머니를 수차례 할머니가 되게 하였다.

이렇게 사는 동안 도로시 데이는 많은 모순에 맞서왔다. 그는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을 시작했을 때 그를 반대하였다. 그래서 프랑코를 무신론자들과 스페인을 장악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는 가톨릭의 지도자로서 하느님이 보낸 사람으로 생각했던 많은 <가톨릭일꾼>의 가톨릭독자들을 잃었다.

도로시 데이는 2차대전 때에도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참으로 외로운 입장을 취했다. 그때 많은 가까운 친구들과 가장 열성적인 동료들이 맹렬하게 그를 반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금 우리들이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계속했다. (그와 피터 모린이 가장 먼저 시작한 첫 번째 일은 할렘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1960년대의 그를 잘 기억하고 있다. 남부에서 버스를 타고 민권투쟁에 가담하고 서부해안의 씨저 샤베즈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때에 그는 행진과 피켓시위와 감옥의 대가가 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살고 가볍게 여행하는 것을 배운 사람이었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는 매일 기도할 수 있고, 성서를 읽으며 미사에 참석하고 성체를 영하며 고백성사를 보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죽기 얼마 전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가톨릭일꾼 사무실로, 요셉의 집으로 그리고 그가 살고 있었던 매리의 집에 갔었다. 그는 매우 약했으나 꼿꼿했고, 가톨릭일꾼 급식에 스프와 커피와 빵을 먹으러 매일같이 오는 수백 명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누곤 했던 때의 힘찬 모습처럼 품위가 있었다.

우리는 약간의 추억들을 나누었고,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글을 쓰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도 사랑하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디킨스의 <작은 도리트>를 다시 읽고 있었다. 약해져 가는 폐의 기능과 심장근육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곧 끝날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덧붙였다;

“난 되돌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삶을 기억해 보려고 해요. 지난번에는 ‘기억되는 삶’이라고 썼어요.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요약해보고 무엇이 가장 중요했고 가장 문제였는지 써보려고 했어요. 그러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앉아서 우리 주님에 대해, 수십 세기 전에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의 가장 큰 행운은 삶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분을 내 마음속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내 자신에게 말했지요!“

나는 이 말을 듣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메이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약간 촉촉해 졌으나 그는 재빨리 톨스토이에 대한 그의 큰사랑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도 그가 이미 주제를 바꾸었다는 것처럼.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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