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으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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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으로 사는 법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2.01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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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 2021.1.26.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1. 아무 연고 없는 파주 당하동으로 이사오고 나서 벌써 15개월 가량 된 것 같습니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도시외곽의 쇠락한 마을 언저리에 집이 있습니다. 얼마전에 생긴 편의점과 이마트가 이 동네 랜드마크입니다. 멀리서 이마트가 보이면 우리집이 다 왔구나 싶고, 한밤중에는 24시간 불 밝히는 편의점이 고맙습니다. 헌것들 사이에 낀 새것처럼, 가끔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은 제가 좀 세속의 물이 짙게 든 까닭이겠죠.

2. 이곳에서 가까이 사귄 몇몇 이웃이 있습니다. 바로 앞집은 일상사를 나누고 있는데, 현재 동국대 철학과 교수이시고, 올해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직업은 교수이신데, 사실상 제가 늘 접하는 분은 '정원사'입니다. 어찌나 마당을 잘 가꾸시는지 매번 볼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살림살이에 정통한 그분께 뭐든 묻고 도움을 청합니다. 제가 그분께 보답하는 방법은 이따금 사모님 몰래 담배 한 개피 씩 제공하는 것입니다.

3. 저희 집으로 진입하는 언덕받이에 사는 아주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화초를 잘 가꾸고, 날마다 산에 오르고, 좋은 화초들은 언제든 이웃에게 나눠주십니다. 저희 마당 화초중에는 그 집에서 분양받은 게 제법 됩니다. 요즘은 겨울이라 하고 많은 시간을 무엇하며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거의 말마다 저희 집 앞길을 오가던 분입니다. 저희 옆집 할머니께서는 땅만 보이면 농사를 지시고, 이 아주머니와 아주 가깝게 지냅니다.

4. 마을 어귀에 사는 두 집 (아주 젊은) 남정네들은 이런저런 일을 하다 얼마 전부터는 가구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일 거리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만, 이곳에 와서 만났는데 형제같이 지냅니다. 늘 붙어 다니는 듯 싶은데, 얼마 전에는 제게도 봄 되면 함게 가구나 만들자고 하더군요. 제가 집 고치는 걸 보고 하는 말인듯 싶습니다. 뭐든지 '생산'하는 것은 재밌고 보람된 일입니다. 글만 쓰며 사는 것처럼 한심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싶습니다.

 

 

 

 

5. 오늘의 하이라이트! 아내가 말하더군요. 동네에 비파 만드시는 분이 계시다고. 흥미만땅입니다. 언덕받이 초입에 있는 작업장을 아내와 찾아갔습니다. (그분의 구체적인 개인사는 프라이버시라 생략하겠습니다.) 세상천지에 혈혈단신으로 살면서, 재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서 음악공부를 했답니다. 비파를 연주하는데, 그게 사는 데 보탬이 안 되어서 비파 만드는 기술을 그곳에서 배웠답니다. 이제는 연주자가 아니라 기술자가 된 것입니다.

6. 저희 집 피아노 조율을 부탁하고, 그날 늦도록 차를 마시며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 편안하고 따뜻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후로 방앗간 참새처럼 작업장을 드나들며 고구마도 얻어먹고, 작업장도 구경합니다. 아침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듣는 분입니다. (고백하건대) 이분은 저희들과 영혼이 통하는 분처럼 느낍니다. 아주 현실적이면서 그 현실 너머를 사는 분입니다.

7. 그분이 어느날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저를 불러 세웁니다. 바퀴 덮개 부분이 다 삭아서 보기 싫다면서, 고쳐주겠다고 합니다. 제 차는 2007년식 프라이드입니다. 20만 킬로미터를 훌쩍 넘어 30만 킬로미터를 향해 가는 낡은 자동차지요. 저는 그동안 새 차를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늘 중고차만 끌고 다니다보니, 외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 분 생각은 다르더군요. 자기도 직접 손보면서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분은 빨강색 낡은 모닝을 타고 다닙니다.

8. 그분은 필요한 연장을 다 갖고 계십니다. 전동드릴과 연마기...등등. 쇠판을 잘라서 삭아서 구멍 곳을 덮고, 빠다를 발라 틈을 메웁니다. 그리고 제가 이마트에서 사온 흰색 도장용 스프레이를 뿌리니, 좀 울퉁불퉁해도 떨어져서 보면 말끔합니다. 앞으로 일 년을 더 타더라도 손 보면서 타라고 합니다. 그분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엿보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안 하든 작은 부분도 허투로 하지 않고 세심하게 돌보며 관리하며 사는 거지요.

 

9. 남의 일을 제 일처럼 정성으로 돌보아주는 마음이 참 존경스럽고, 작은일도 성심을 다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비파는 아주 섬세한 악기여서 그분이 작업하시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합니다. 그분은 봄이면 남의 집 담장에도 나팔꽃을 심습니다. 그분 작업장엔 한뼘 땅도 없는 까닭입니다. 예전에는 앞집이 비어서 그 집 마당에 꽃을 심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큰 차로 옆에 시에서 꽃들을 많이 심는데, 가을이면 그곳에서 씨를 받아둔다고 하더군요.

10. 예전에 딸아이를 키울 때 함께 읽던 동화가 있습니다. 마이클 베다드가 쓰고 바버러 쿠니가 그린 <에밀리>(비룡소, 1998)입니다. 이 동화는 평생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한 소녀가 어머니를 따라 에밀리의 집에 피아노를 쳐주러 놀러간 이후 그들 사이에 맺은 우정을 그립니다. 첫날 그 소녀는 백합 알뿌리를 선물로 주고 에밀리는 시를 한 편 적어서 주지요. 이윽고 봄이 오고 에밀리의 집에선 백합이 피었겠지요. 제가 기억이 정확하다면, 에밀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죠. "천사는 네 이웃에 있다"고 말입니다.

11. 천사같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웃에게 천사가 될 수는 있겠죠.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천사가 되기를. 그래서 이웃이 관계 안에 들어가기를, 그곳에서 우정이 발생하기를 기대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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