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한 거위들의 신앙은 ‘신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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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한 거위들의 신앙은 ‘신앙’인가
  • 한상봉
  • 승인 2016.07.1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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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한상봉 칼럼]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경건한 풍자’로 유명하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한숨이 나온다. 그가 쓴 ‘집에서 기른 거위’ 이야기가 우리들의 신앙을 아프게 꼬집기 때문이다. 거위들이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보았다. 이 자리에서 한 마리의 숫거위가 설교를 했는데, 거위들에게 얼마나 숭고한 사명이 주어졌는지 말했다. “창조주는...” 예배에 참석한 암거위들은 ‘창조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모두 허리를 굽히고, 숫거위들은 고개를 숙였다.

창조주는 은총 안에서 모든 거위들에게 날개를 주었고, 모든 거위들은 이 날개를 사용해 강 건너 복지로 날아갈 수 있다는 설교였다. 이 집에서 그들은 다만 이방인일 뿐이고, 자유롭게 본향으로 날아가는 게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은 주일마다 이 설교를 듣지만, 집회가 끝나면 저마다 맡은 바 일을 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다시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만이다. 거위들은 식성이 좋아서 곧 통통해졌고, 포동포동 살이 올라 먹음직스럽게 되었다. 그리고는 성 마틴 축제 전달 밤에 집 주인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창조주에게 요구받았던 목표를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사용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위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언제가 올 죽음에 대비하기 보다는 지금 당장 느끼는 자신의 건강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게중에는 괴로워하며 비쩍 말라가는 거위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거위들을 볼 때마다 ‘현실적인’ 다른 거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다고 날 수 있겠어. 날개에 집착하다보면, 저들처럼 말라빠지고, 발육도 못하고, 우리들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듬뿍 받을 수 없어. 우리는 그분 은총으로 이렇게 포동포동 살이 찌고 먹음직하게 되었잖아. 우린 지금 충분히 건강해.”

그렇다고 거위들은 날개를 떼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주일 외에는 날개를 이야기를 하는 거위는 없었다. 이들은 운동을 하지 않았고, 예배 때에 잠시 하는 경건한 허리운동과 목운동으로 만족했다.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예배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콕 집어 이야기 한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지금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설교하고, 설교를 듣지만 아무도 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자기 땅에서도 ‘이방인’처럼 사는 나그네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초의 교부문헌인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 그리스도인은 “지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이라고 하였지만, 다 옛말일 뿐이다. ‘본향’에 대한 기억은 장례미사에서만 반복된다.

그들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목수와 나자렛의 ‘비천한 여종’의 몸을 빌어 허름한 마구간에서 태어난 분이며, 평생 가난한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살다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알긴 알지만, 그분처럼 따라 살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는지는 몰라도 ‘인생 실패자’였다. 로마제국과 유대당국의 반역자였으며, 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살았으니 비참한 최후가 그분의 몫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라는 부활신앙은 사실 ‘부활절’ 전례에서만 통용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부활신앙 때문에 평생을 사순절처럼 보낼 생각이 없다. 이참에 내 자신에게 다시 물어보자.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한 살이 오른 통통한 거위인가, 아니면 ‘복음은 이게 아닌데’ 고민하는 ‘가난한’ 거위인가?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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