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사랑을 떠나 가톨릭교회로
상태바
도로시 데이, 사랑을 떠나 가톨릭교회로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1.31 16: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로버트 콜스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3

방황하는 열한번 째 처녀

시카고에 있을 때 도로시 데이는 자전적 소설인 <열한번 째 처녀>를 썼다. 수년이 지난 후 그는 이 책을 발간한 것을 후회했고 남아있는 모든 책들이 마술같이 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뉴올리언즈에 있을 때 헐리우드에서 그 당시로는 엄청난 가격인 5천불에 그 책을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은 젊은 여주인공의 삶을 솔직하게 그리고 있었다 ­ 그의 활발하고 자유분방한 삶, 그의 짧고도 비극적인 사랑, 그의 낙태, 사랑 없는 결혼 그리고 끝없는 여행에 대하여.

소설의 서투른 구성은 해설자의 유머감각과 우리 모두가 보지만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낯선 이들을 관찰하는 능력으로 빛을 받고있다. 감옥에 있든 그냥 거리를 걸어가든, 가게에서 무엇을 사고, 길을 묻고, 책방에서 이 책 저 책을 읽고 있을 때나 극장,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을 때든 도로시 데이는 항상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잠깐동안이라도 그들이 자신의 삶에 한 부분이 되도록 하였다.

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 특별한 자질은 나이가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우리들이 우리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에 더 많은 벽들을 세우려고 할 때에도 그리고 자연적으로 자주 그런 충동을 받을 때에도,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정신적 신체적 역량이 제한 받고 우리를 고립시킬 수 있는 때에도 도로시 데이는 이 특별한 자질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그는 뉴올리언즈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해변에 집을 얻어서 진지한 작가로서의 삶을 추구하였다. 28세에 그는 정착해서 그의 문학적 능력을 결정적으로 시험하고 싶어했고 처음으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는 4년 동안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집에서 살았다. 일흔 두 살 인생의 어느 늦은 저녁에 되돌아보면서 그는 그의 문학적 야심과 바다를 연결시켰다.

“나는 부르클린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태평양 바다를 보고 얼마나 즐거워하였는가를 우리에게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또한 미시건 호의 해변을 따라 걷는 것도 어머니가 얼마나 즐겼는지 기억하지요. 그리고 어머니가 물이 가까이 없는 도시에서 절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다. 빵과 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물은 나에게 그분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20대에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돌아다보면 나는 뉴욕, 시카고, 뉴올리언즈에서 내가 얼마나 물을 보고 싶어했는지 기억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나간 세월은 희미해지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미시간 호수, 대서양 그리고 허드슨 강과 동쪽 강, 미시시피 강과 포토막 강은 사라지지 않아요. 물을 보는 편안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피켓 시위와 행진을 하기 위해서 워싱톤에 며칠 있을 때에도 나는 강을 보고 싶었어요. 바다 가까이에서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들은 즉시 그에게 과거로부터 떨어진 느낌을 주었고 그것 때문에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 시기의 생활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묻자 그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성급해지면서 아직도 떠오르고 있는 “물”의 이미지로 돌아갔다.

“당신은 사람들의 이름과 만남에 대해서 묻고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20대의 나를 생각해보고 싶으면 어떤 사람이 표류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심각하게 내가 누구의 물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테이튼 아일랜드 해변을 따라 떠다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바다 가까이 있으면서 나는 삶의 질곡들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때에 외로움과 상실감을 느낄 때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랑과 아이의 출산

1925년 그는 다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비록 그는 전에 사랑했던 사람들보다 더 안정되고 도로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그에게 “어려운 시간들”을 주었다. 그가 자서전과 대화 도중에 말했던 그 남자는 배터햄 포스터인데, 생물학자이며 아나키스트였고 절대적인 무신론자였다. 그들의 결혼은 “상식 법에 의한 결혼”이었다고 <긴 외로움>에 써있다.

도로시는 포스터의 여동생의 소개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배터햄은 진보적이고 땅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정치관은 양립될 수 있었다. 수년동안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아이를 원했다. 포스터는 세상의 전망에 대해 우울해했고 그 자신의 핏줄인 또다른 세대가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코와 봔제티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전기의자로 보내졌을 때, 포스터는 기가 빠져서 깊은 절망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사람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50년이 지난 후 도로시 데이의 말을 빌리자면, “두 사람의 처형,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사였고 너무나 정중했던 두 사람의 처형은 포스터에게 마치 세상의 모든 품위가 그들과 함께 다 살해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쯤 포스터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들의 딸, 타말 데레사가 1927년 3월에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그들은 뉴욕의 진보적이고 문학적인 세계에 많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들의 많은 친구들은 지금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도로시 데이가 그런 것처럼 소설가나 시인들이 되기 위하여, 혹은 정치적 행동이나 논쟁적인 글들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타말 데레사는 어머니의 서른 번째 생일이 오기 여덟달 전에 태어났다. 도로시 데이는 <새로운 대중>에 아이의 출산을 묘사하는 훌륭한 글들을 썼다. 그는 그렇게 행복해 본적이 없었다. 다른 한편, 포스터는 기쁨과 거리가 멀었다. 철저하게 정중한 그는 아직껏 도로시를 사랑했고 그들의 딸로부터 등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는 아버지노릇을 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먼저, 그의 딸이 1927년 7월에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도로시 데이는 그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 포스터는 그 해 늦은 12월에 그가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로 청할 때에 영원히 헤어졌다. “세례를 받기로 한 날..” 하고 그가 말했었다, “얼마나 그 순간을 오랫동안, 일생동안 기다리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많은 친구들이 그 반대로 생각했지만 그의 삶이 이제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에 입문하다

어떻든지, 그는 나머지 53년의 세월을 다르게 살아갈 것이었다. 그는 딸과 함께 스테이튼 아일랜드를 떠나 뉴욕의 서쪽 14번가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과달루페의 성모 성당에 가까이 있기 위해서”였다. 항상 소설과 사회정치에 관한 글들을 읽었던 그는 이제 철학과 신학 책도 읽었다. 그는 자카리 신부를 고해신부로 삼았고 거의 매일같이 그에게 갔다. 그는 여느 가톨릭인 일뿐 아니라 교회가 창립자로 내세우는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을 열심히 배우고 싶은 가톨릭인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의 개종은 명목상의 개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후 몇년동안, 도로시 데이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 지상에서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속 방황했다. 그는 아직도 사회운동가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쏟고 인종과 국가간에 보여지는 증오에 대해 걱정하며 화해 동지회에 일자리를 얻어 함께 일했다. 그는 희곡을 하나 썼는데, 뉴욕시의 감독들과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빠떼와 계약을 해서 헐리우드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한 동안 영화 각본을 쓰면서 일했다. 그러나 그곳은 그가 소화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고 그래서 곧 멕시코로 떠났다. 수개월 동안 멕시코시의 한 친구네 집에 머물렀다. 그는 멕시코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다. ­ 따뜻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무엇보다 가톨릭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타말이 병나서 그들은 서둘러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 때는 경제 대공황의 시기였고, 그는 주변 어느 곳에서나 보여지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만연된 가난이었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일을 찾는 사람들, 아무거나 구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멸시와 위험을 겪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국가의 중요한 기관들이 식량과 잠자리와 입을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믿었다.

도로시 데이는 미국이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고 그는 뉴욕이나 다른 도시에 얼마나 많은 부가 있는지 보아왔다. 화려한 연립주택들과 아파트들이, 상점과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많은 부유한 교회들이 엄청나게 많이 즐비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는 잘 차려입고 잘 먹은 본당신자들이 양떼처럼 오고 있었다. 그는 단순하게 “삶의 불공평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성서를 읽고 매일 교회에 갔다. 그는 교종의 회칙들이나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들이, 그분의 모범과 그의 훈계들이 어떻든 잊혀졌고 심지어 사제들과 수녀들, 주교들과 추기경들도 잊고있다고 느꼈다.

그의 응답은 교회를 등지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처럼, 오히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혼동과 개인 삶에서 저질렀던 과오들을 더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는 도덕적인 분노가 자신을 소모시키고 쓰라린 회한이나 잘난척하는 자기 독선적인 사람이 되게 할까봐 두려웠다:

“난 피터 모린을 만나기 전의 그때 시절을 기억해요: 나는 신앙을 잃을 찰나에 있었어요. 방금 가톨릭이 되었는데 말입니다. 난 내가 본 것에 매우 화가 나 있었습니다 ­ 너무나 많은 고통에 대한 교회의 명백한 무관심의 태도를 본 것입니다. 초기 공황 시기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고 당황스럽고 멍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이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떤 그룹들이 그들을 도우려고 했지만, 국가나 교회는 나의 ‘급진적’인 친구들처럼 놀라지도 않는 것 같았습니다.”

<긴 외로움>에서 이런 친구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들의 활동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하고있다: “물론 이 그룹 중에는 가톨릭신자들이 있었지만, 가톨릭 지도자는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 해에(1929년) 교종 비오 11세가 벨기에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었던 조셉 카르댕에게 슬프게 말했다, ‘세계의 노동자들은 교회로부터 잊혀졌습니다.’”

그는 교종의 그 말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의 전 삶은 1932년부터 죽을 때까지 노동에 대한 찬탈로부터 노동을 보호하는 일에 바쳐졌다. 1932년 11월에 그는 워싱톤에서 “굶주림의 행진”이 있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것은 수백만 시민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크고 분명하게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가톨릭 잡지인 <공공복리>에 이미 많은 글들을 써 왔고 그의 옛 정치활동의 소굴인 유니언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미국 국회의사당의 계단으로 그들의 상황을 가져가려고 했다. 그는 두 번째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소설로서 일이 없는 사람들, 길거리 사람들의 매일의 체험들을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였다. 워싱톤 여행이 소설 쓰기를 중단시키겠지만 그는 워싱톤에 기꺼이 가기로 하였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