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는 예수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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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예수 닮았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1.2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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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생각-2021.1.24.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1.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제는 인천 배다리 책방골목에 나들이 다녀왔습니다. 삼십 년 가까이 살았던 인천에서, 배다리는 헌책을 사러, 인근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다니느라 학창시절 발이 닯도록 다녔던 길목들이 허다 합니다. 수십 년 전부터 개발이 멈춘 쇠락하는 구시가지만, 이런 묵은 집과 거리와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닿는 것은 제가 늙어가기 때문일까요? 나이 드는 것과 늙는다는 말의 뉘앙스 차이를 여기서 느낍니다. 이제 우리 나이에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 귀한 과업이겠지요. 성장이 아니라 성숙해야겠지요.

2. 초입의 <나비 날다>라는 한 뼘만한 책방에는 여러번 파양되어 여기서 기르기로 했다는 고양이 한 마리 느긋하게 종이박스 안에서 난로를 쬐고 있었습니다. 임대료 벌기도 힘들다고 하네요. 그래서 책방 주인은 이런저런 다른 일로 과욋돈을 벌어 책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랑방 같이 다정하고 아기자기하고, 고양이가 상전인 공간입니다. 유서깊은 아벨서점에서는 <톨스토이>(얀코 라브린, 한길사)와 <씨알 함석헌 평전>(이치석, 시대의 창)을 저렴하게 구입했습니다.

3. 요즘 제 영혼이 자주 가서 닿는 곳은 미술+러시아 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들은 러시아 사람들입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 이걸 미술과 접목시키면 일리야 레핀이 떠오릅니다. 조만간 일리야 레핀을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레핀은 볼가강가에서 배를 끌어올리는 인부들의 그림이 가장 유명합니다. 어느 혁명가의 귀환도 마찬가지고요. 말할 수없이 슬픈, 아득하게 어두운, 그렇지만 혁명이란 말이 저절로 나오는 땅이 당대의 러시아였던 것 같습니다. 이콘과 도끼의 나라, 종교와 혁명의 땅을 생전에 한 번은 밟아보고 싶습니다.

 

사진=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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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쯤하고, 이제 공부해 볼까요. 정양모 신부님의 교회혁신 9개조 가운데 첫번째입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에서 예수의 신앙으로.

5. 정양모 신부님은 먼저 불트만 등 20세기 독일 성서학계를 중심으로 예수의 역사적 실상보다는 오로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반대합니다. 예수가 품었던 신앙을 알아야지,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더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신앙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이력과 경험에 따라서 예수를 저마다 해석해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계급적 이해가 덧붙여진다면 더 큰 문제입니다. 종교-정치적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기성체제를 유지 온존하는데 기여하는 유약한 분,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남겨둘 위험이 있습니다.

6.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령은 예수가 바라던 바를 바라고, 예수가 행하던 바를 행하고, 예수가 느끼던 바를 느끼고, 예수처럼 사는 것이라는 게 정양모 신부님의 생각입니다.

7. 예수는 아기처럼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고, 그래서 하느님과 우리는 부자유친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 아빠는 물론 가부장적 의미의 아빠가 아닙니다. 렘브란트가 <돌아온 탕자> 그림에서 잘 표현하고 있듯이,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가엾은 아들을 품에 안는 그런 자비로운 아버지입니다. 드니 지라는 <연꽃과 십자가>(생활성서, 20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이를 안고서 처음으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서 묵상하던 때가 마치 어제 같다. 그때 한순간에, 이 아버지 상의 부정적인 면이 싹 사라졌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듯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깨달았다."

8. 예수의 사상은 한 마디로 경천애인,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정양모 신부님은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둘이 아니라는 게 예수사상의 요체라고 말합니다. 랍비 힐렐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음서의 나머지 이야기는 경천애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이웃사랑은 "함께 사는 이웃, 함께 배우는 이웃, 함께 일하는 이웃에서 시작하여 차츰차츰 넓게 번져나가야" 합니다. 정양모 신부님은 막연히 '인류애'를 입에 담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자칫 공허한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몰염치와 다를 게 없다는 뜻이겠지요.

9. 정양모 신부님은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갔을 때 하느님께서 보시고 "얘는 예수 닮았네." 하시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하십니다.

10.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제의를 행하고 봉헌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런지, 개신교에는 <예수살기 모임>이 있고, 가톨릭에는 <예수살이 공동체>가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알아들은 사람들이 시작한 신앙운동입니다.

11. 여기서 복음서를 다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아빠라고 불렀던 그 하느님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그분이 사랑하던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이 사랑하던 백성 가운데 나도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갈릴래아의 바닷가에서 어부들과 세리와 매춘부와 걸인들과 병든 자들을 가까이 두셨습니다. 그들을 만지고 그들을 치유하고, 무엇보다 그들과 한 식탁에 앚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시간을 즐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그분과 더불어 먹고 말하고 앉고 서고 걷기를 희망합니다.

12. 예수의 하느님 신앙은 성전 너머에 있습니다. 유대교와 가톨릭과 개신교와 이슬람과 불교 너머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 안에 계시면서 그 모든 것 너머에 계신 분을 예수는 아빠라 부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인 신동엽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모든 껍데기는 가라"고 했다지요. 그 향그러운 흙가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그리스도인을 꿈꿉니다.

13. 그래서 먼 훗날(가까운 장래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분께서 제게 들릴듯말듯 아주 작은 음성으로 "얘는 예수 닮았네."하고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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