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으로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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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하는 말
  • 박철
  • 승인 2021.01.1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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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예수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 죄목으로 예수를 고소했다. 그러나 예수는 구태여 그들의 거짓 증거에 대하여 구구한 변명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침묵하였을 뿐이다.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로 예수를 고발하였다.

빌라도는 다시 예수께 물어 말하였다. “당신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사람들이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당신을 고발하는지 보시오.”(3-4) 빌라도가 이상히 여길 정도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고 명예가 훼손되며 권리가 침해된다고 느끼면 곧잘 화를 내고 자기방어를 한다.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구차스럽게 변명하지 않았다. 장황한 이유를 대고 긴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침묵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그토록 억울하게 누명을 쓰시고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순간에 한 말씀도 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을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모든 사람이 다 오해하고 그릇 판단할지라도 하느님이 나를 바로 판단해 주시리라 믿으셨다. 그러니 두려울 것이 없으셨다.

참 신앙인은 어떤 환경, 억울함과 누명 속에서도 조용히 침묵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진리는 언젠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설령 밝혀지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 앞에서는 공정하게 밝혀지는 까닭이다. 서양 속담에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는 말이 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속담은 말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의미 없이 쏟아놓는 말보다는 무언(無言)이 향기롭고,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바에야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는 뜻으로 보여 진다. 표현력과 발표력으로 지식의 척도가 측정되는 요즘, 말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을 못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 잘한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가?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수한 표현력을 구사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농도 짙은 말을 아껴서 하는 것일 게다. 또한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말이 현실성을 담고 있을 때이고, 표현된 말이 진짜 가치를 발휘할 때는 그 말에 책임이 따를 때이다. 침묵은 하느님께 이르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이레네우스 사상가가 “내가 말한 다음 후회한 적은 있어도 침묵을 지킨 것을 후회한 일은 없다”고 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말의 홍수시대에

오늘 이 시대는 말의 홍수시대이다. 가스와 연기로 세상이 더러워지고 공해가 생기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세상이 질식할 만큼 오염되었다. 아첨하는 말, 중상 모략하는 말,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 길을 걷거나 자동차를 운전해 가노라면 온통 울긋불긋 써 붙여 놓았다. “나를 사세요” “나를 잡수세요” “나좀 타세요” “나하고 같이 자요” 수많은 광고판이 우리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 TV의 약 광고, 화장품 선전이 골치가 아프고 쑤신다. 신문을 보더라도 “사기 당했다. 고소했다. 간음했다. 도둑질했다. 살인했다. 떼먹었다” 현기증이 난다. 남의 밑구멍을 들여다본 기분이 든다. 그런 것을 읽고 그런 것을 듣기 보다는 차라리 백지 한 장을 들여다보는 것이, 독방에서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명쾌한 시간이 되겠는가.

맑은 샘물에 얼굴이 비치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참 모습이 비치는 것이다. 침묵하는 시간은 우리의 속사람을 살찌게 한다. 우리의 내면적인 삶을 풍요하게 만들어 준다. 내가 벙어리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내가 이만큼 안다고 떠드는 동안, 실은 자신이 올라가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얼간이가 되면 주착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진리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참 높은 인격, 참 무게 있는 사람은 함부로 입을 벌려 떠들지 않는다. 침묵 속에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한다. 침묵은 말보다 강하다. 나는 가끔 설교를 할 때마다 차라리 침묵으로 이 시간을 메웠으면 하는 때가 있다. 공연히 진리를 설명하느라고 긴말을 하다보면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값싸게 만들고 왜곡시킬 때가 있기 때문이다.

“최상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괴테) 진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명하다보면 비슷한 모조품이 된다. 현대인의 특징은 조용히 사색하고 명상하며 기도하는 침묵의 시간을 잃은데 있다. 그 시간을 잃어버림으로 천박한 생각, 얕은꾀만 늘었다. 그 천박하고 얄팍한 생활을 살아가려하니 스스로 자신의 올무에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약은 사람이 늘 잔꾀에 넘어진다. 사람들을 만나 떠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할 수가 없다. 공연히 지껄여 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위대한 사상은 침묵의 산물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나는 가끔 잠 안 오는 새벽에 일어나 가만히 앉아 묵상하노라면 산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기운과 영감이 솟구쳐 오르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주로 글을 아침에 쓴다. 인도의 간디는 월요일은 ‘침묵의 날’로 정해놓고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히 자연을 산책하거나 침묵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의 위대한 사상과 철학은 침묵의 산물이다. 예수도 침묵을 보여 주셨다. 침묵을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구해주실 때도 침묵하셨다. 땅에 말없이 글을 쓰셨을 뿐이다.

위대한 사상, 위대한 인격과 신앙은 침묵의 산물이다. 야고보 선생은 “혀에 재갈 물리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리는 사람이다”고 했다. 침묵하기를 배운 사람은 자기 인격과 삶을 통제하기를 배운 사람이다. 속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떠들어대고 자기를 선전한다. 병에 물을 가득 채우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을 반쯤 채우면 소리가 난다. 국민학교 시절 나는 30리길을 통학했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다 먹고 책보에 싸서 메고 돌아오면 ‘달그락’하고 소리가 난다. 뛰면 ‘달그락 달그락…’ 더 요란한 소리를 낸다.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사람이 부드러워지고 조심스러워진다. 그 얼굴 표정이 온화하게 바뀐다. 어떤 분이 “교인들이 주고받는 전화를 일년동안 녹음을 했다 틀어놓으면 아마 들어볼만할 것이다”고 했다. 모르긴 하지만 남을 칭찬하거나 위로하는 말보다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격려하는 말보다 이 사람을 욕하고 저 사람을 흉보는 말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아마 그것을 듣는다고 하면 기철초풍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전화와 녹음을 지금 듣고 계신다. 그렇다면 얼마나 하느님께서 가슴 아프시겠는가? 교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얼마나 섭섭하시겠는가? 하느님은 말로 주고 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주고받는 말까지 다 듣고 계신다. 사람이 잠자코 있을지라도 그이 마음이 다른 사람을 욕하고 저주하고 있다면 그는 중단 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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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장엄한 설교

중세기 한 수도사가 교인들에게 광고하기를 오늘 저녁은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가장 장엄한 설교를 하겠다고 했다. 그날 저녁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질 무렵 이 수도사가 촛대가 있는 대로 나가서 촛불 하나를 켜들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발에 박힌 그 못 자국에 불을 비추고 손, 옆구리에도 불을 비추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마지막으로 가시관을 써 피가 흐르고 있는 그리스도의 이마에 불을 비추었다. 이것이 설교의 전부였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모인 신도들은 그 침묵 속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그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말이 필요치 않다. 이것이 침묵의 설교이다.

나는 종종 우리 교우들이 너무나 많은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귀가 무디어졌고, 그들의 심령이 녹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침묵은 위대한 설교이다. 인간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음성이 우리의 심령에 울려 퍼지게 하는 위대한 설교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말없는 설교이다. 침묵은 우리를 위대한 순례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순례자는 진리를 쫒아가는 사람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먼저 침묵을 배워야 한다. 침묵은 우리의 내면의 불꽃을 지켜준다고 한다. 내면의 불꽃은 성령의 불꽃이다. 증기탕 문을 열면 곧 그 열기가 사리지고 만다. 입을 쓸데없이 벌릴 때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떠나고 만다.

침묵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침묵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말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 천박하고 시끄럽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사회를 더럽히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귀하고 값있는 말은 침묵 속에 훈련되고 정화된 말이다. 2021년 한해가 막 시작되었다. 새해를 맞이하여 모두 예수의 침묵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박철
탈핵부산시민연대 상임대표
샘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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