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구상의 “하느님,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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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구상의 “하느님, 맙소사!”
  • 김유철
  • 승인 2021.01.10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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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 무렵 구도(求道) 시인 <구상 평전>(분도출판사)이 나올 때 평전의 의미를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현동 아빠스는 이렇게 말했다.

“백 년 전, 이 땅이 해방의 열망으로 꿈틀대던 때 한 시인의 지상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외세지배와 민족분단과 동족상잔, 그 고난의 역사 속에서 정련된 시인의 문학은 끝내 큰 물 줄기를 이루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영원의 세계를 갈망하던 시인은 비극적 현실을 초월한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초토(焦土)에서 다시 생명이 피어나기 바라던 시인의 소망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관통하여 가혹한 운명의 굴레 속에 주저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로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이 평전은 시인의 문학 작업을 기리는 사업에 마침표를 찍는 일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참 많다. 당연히 각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의 숫자도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종교라고 부르는 굳은 몸통을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종교란 굳은 몸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한마디로 규정지어 부를 수 없는 것이며, 침묵속의 걸음에서 마주하는 새벽안개 같은 것이다. 더욱이 시인의 심성으로 만나는 종교란 하늘을 ‘현(玄)’이라 표현했던 옛사람의 탁월한 생각 앞에 무릎 꿇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시인 구상(具常, 1919-2004). ‘가톨릭’이라는 문턱을 넘어 심오한 종교적 영성을 지닌 시인하면 떠오르는 이는 누구보다 먼저 이 사람이다. 시인의 굴곡 많고 뒷말이 다양했던 속세생활과 우리 편, 남의 편 가리지 않고 마주한 수많은 인물들과의 교류에서 나온 후일담은 시인의 삶을 그물코처럼 엮어 내었다. 한강변에 위치한 그의 집을 관수재(觀水齋)라 부르며 시인은 그만이 지닐 수 있는 멋스런 하얀 턱수염을 간직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시인은 늘 자신의 생애 내내 함께 했던 검고 흰 그림자를 부끄러워했다. 시인 구상의 대표적 시집인 <인류의 맹점(盲點)에서>(문학사상사, 1988)는 <관수재시초(觀水齋詩抄)>로서 발간된 것이다. 거기에 실린 시다.

어느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하고 읊었지만/ 나는 마음이 하도 망측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고 어쩌구커녕/ 숫제 두렵다. (‘고백’ 일부)

나는 날마다/ 성당에 나가듯 윤중제(輪中堤)에 나아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 그 물에 헹구고 씻고 빨아보지만/ 절고 찌들은 땟국은 빠지지 않는다. (‘근황’ 일부)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임종고백’ 일부)

시인은 평생 자신이 걸었던 삶의 길과 신앙의 대상 앞에 선 마음을 “하느님, 맙소사!”란 시어로 가름했지만 그 외마디를 가로지르는 검고 흰 그림자의 깊이는 더듬어 짐작할 뿐 후배 신앙인이자 시인으로서는 언감생심 가름되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같은 말이 나오리라 여긴다. “하느님, 맙소사!” 밝은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톺아보면, 21세기 초엽 한반도 남쪽 인구 중 절반을 훌쩍 넘는 종교 인구는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현실의 삶과는 간격이 더욱 커질 뿐이다. 우스운 것은 각 종단이 밝힌 종교인의 수가 총인구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그만두세욧!”으로 유명했던 잘 사는 동네의 국회의원처럼 자신의 종교를 삼중 혹은 사중으로 등록한 사람이 있듯이 허깨비 숫자가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종교가 살아있는 생명이거나 굳은 몸통을 넘어 요지경 동굴이 되어버린 것이다.

앞서 말한 전직 국회의원이 아니라도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종교생활은 하나의 필수이기도 하다. 사실 정치권에서 종교인의 통계를 내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를 두루 섭렵하는 ‘개불천교’ 신자를 각 종단이 자기네 사람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세상의 종교를 모두 초월한 해탈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와 공직자 현실을 보면 해탈은커녕 출세의, 출세에 의한, 출세를 위한 아수라장에 가까울 따름이다.

열성이 아니라 영성을

현재 우리나라는 다종교국가임과 동시에 종교인의 국가임에 틀림없다.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종교전쟁 혹은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벌어지는 종교를 빌미로 치르는 분쟁만 없을 뿐이지, 대도시의 지하철이나 터미널은 선교경쟁의 장소이고, 웬만한 지역에는 각 종교들이 겹겹이 포진해 있다. 그 뿐이랴, 같은 종교 안에서도 이른바 ‘내 식’으로 믿어야 한다는 교리근본주의와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는 각 종교의 모임형태가 세상의 걱정과 지탄을 받고 있으니 스스로 돌아봐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자.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신앙인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자랑스러움 이전에 이미 자신의 얼굴에 숯 덩어리를 올려놓았다는 말일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러움의 연속이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서 행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책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는 길이다. 구상 선생이 시인이기에 그 마음을 “하느님, 맙소사!”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앙인이기에 그런 마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인은 많고 넘치지만 신앙인이 없는 세상이라고들 말한다. 더욱이 맑은 신앙인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가 있는가? 교회와 성당을 가는 사람들, 사찰을 찾는 사람들, 기품어린 서원에서 예를 갖추는 사람들이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의 길로 걸어가면 될 일이다. 도(道)는 길이며 걷는 행위이다.

‘열성’이 아니라 ‘영성’이 종교창시자들의 의도를 생활로서 실천하게 하듯이, 열성이 뻗친 종교인이 아니라 맑음이 담긴 영성의 신앙인이 그리운 시절이다. 사랑이란 말은 이제 빛이 바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라는 말이며, 자비롭단 말은 허공에 사라진 말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자비로워야 한다는 낮은 목소리다. 휘파람새의 맑은 소리와 물가를 노니는 도요새의 한가로운 모습에서 밝고 맑은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신앙인이다.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동자꽃과 온 몸에 가시를 박고도 해맑은 가시꽃을 보며 소박한 땅의 발걸음에 충실한 것이 신앙인이다. 겨울이 오면 결코 봄이 멀지 않았음을.

김남조 시인이 <구상 평전>에서 “구도자이며 시인이신 구상 선생은 한국 현대의 정신사와 문화사가 더욱 진지하게 추구되고 실천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람은 우선 그 자체부터 낯설음의 심연입니다만 그러나 몇몇 분의 선도자가 앞장서 갔음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했듯이 우리에게는 한 하늘 아래에서 오래도록 함께 머물었던 고뇌와 탐색을 통한 신앙인 시인 구상이 있었다. 선생은 2004년 5월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장례미사를 마지막으로 영(靈)과 성(聖)의 세계로 떠났다. 그로부터 5년 후 2009년 김수환 추기경도 같은 길을 갔다.

하늘과 땅의 만남, 그 만남 속에 통로이기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존재. 아마도 그것은 선택이나 성별(聖別)의 존재가 아닌 그저 ‘있음’으로서 충만한 그런 존재일 것이다. 그런 ‘있음’으로 아름답고 내밀한 신앙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더운 밥 한 공기 서로 나누는 것이 교리 한 구절 외우는 것보다 우선이며, 생명과 평화가 모든 경전의 마침표이길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오늘도 교회의 종이 울리고, 사찰의 운판이 화답하며, 모스크에서 맑은 기도 소리가 나온다. 얼마나 서럽도록 고마운 일인가.

시인 구상의 시집 <인류의 맹점에서>를 다시 펼치면서 사라진 듯해도 여전히 시 행간에서 울리는 마지막 고백이 된 선생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요 속에 나또한/ 고요히 잠겼노라니/ 그 고요가 고요히 속삭였다./ 이제 너의 참 마음을 열어 보라고 // 그러나 나는 말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고요’ 일부)

나의 거짓 사연에/ 그대들은 속지 말라// 그리고 정녕 속 깊은 사연은/ 아직 한 번도 내지 못하였음을/ 이제사 그대들에게 고백하노라. (‘나의 시2’ 일부)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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