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는 혼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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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는 혼자 죽는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1.03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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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청소] ,김완, 김영사, 2020

얼추 이십 년 전 일입니다. 1999년 불암산 자락의 상계동 산동네에 살던 저희는 귀농할만한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전북 무주의 500고지 산자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희 집 창문에서 바라보이는 비좁은 골목 너머 맞은편 집 보일러실 지붕 위에 살던 길고양이들을 발견했습니다. 새끼고양이 네 마리가 옹송거렸는데, 그중에 밥을 던져주어도 제때 챙겨먹지 못하던 빈약한 새끼 한 마리를 배드민턴 주머니에 담아서 무주로 함께 이사했습니다.

그 아이를 ‘꼬맹이’라 불러주었습니다. 고양이를 키우는데 아무런 정보도 없던 저희는 강아지를 키우듯 고양을 다루었습니다. 농갓집에서 식은 밥을 먹던 꼬맹이는 재 너머 산논에도 강아지처럼 따라 왔고, 겨울에는 아궁이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나흘 집을 비운 사이에 꼬맹이가 사라져 그 뒤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아이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동네에 사나운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녀석을 의심할 뿐이었습니다.

그 후 저희가 경주로 다시 서울로 이사하면서 두 번째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다니던 저희 딸이 학교 운동장에서 주워 왔습니다. 습식사료 캔과 함께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진 이 아이는 버려진 집고양이 새끼였습니다. 주먹만 했던 이 아이가 ‘노리’입니다. 벌써 8년째 저희와 살고 있는 삼색이입니다. 아내는 사라진 ‘꼬맹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걸 자책하며 ‘노리’를 알뜰히 챙겼습니다.

그 뒤로 고양이 두 마리가 저희에게 더 입양되었습니다. 벵갈인데, 딸아이가 성화를 부려 할 수 없이 데려온 이 아이들은 캐나다로 떠나는 청년이 맡긴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이 청년은 부산 <소년의 집> 출신이라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며 쉐프를 꿈꾸던 사람입니다. 세 평 남짓한 원룸에 침대를 빼곤 고양이 물품으로 가득찬 그이 방을 보았습니다. 고아로 자라나 외로웠을 그 청년에게 이 고양이들은 식구와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삼돌이’와 ‘애기’입니다. 이 청년이 캐나다에서 부디 바랐던 일을 성취하고 잘 자리 잡기를 이참에 바랍니다.

저희가 지긋지긋한 전셋집 생활을 끝내고 은행대출을 끼고서라도 파주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한 데는 고양이들도 한 몫 했습니다. 터주였던 노리랑 벵갈 고양이들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차단문을 경계로 아래층에는 노리가, 위층에는 벵갈이 살고 있습니다. ‘노리’는 아래층에서 낯선 새집 벽지를 긁어서 익숙한 헌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벽지 아래쪽이 누더기가 되어가니까요.

삼돌이는 예민해서 변기를 제때 비워내지 않으면 이불 위에 오줌을 싸서 애를 먹입니다. 고양이에게 사람은 ‘집사’라는데,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 록 밴드 ‘슬립낫’(Slipknot)의 베이시스트였던 폴 그레이(Paul-Gray)는 “고양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섬겨야 한다는 정설을 깨뜨리러 세상에 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더 높은 인간과 그를 섬겨야 하는 낮은 인간이 없는 것처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동물 따위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고양이의 죽음

최근에 사놓고 읽기를 미루어 두었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특수청소 전문가 김새별 대표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연히 책방에서 <죽은 자의 집 청소>(김영사, 2020)라는 책을 발견했던 겁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는지 선뜻 표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죽음 언저리에서 행하는 특별한 서비스”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쓴 김완은 특수청소 서비스회사 ‘하드웍스’를 차렸고, 시를 전공한 탓인지 자신의 경험을 전하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바닥부터 훑어버렸습니다.

먼저 길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있는 동안 고양이는 아름답고 우아합니다. 태생적으로 용변을 가리고 스스로 핥으면서 몸단장을 하는 고양이를 사람들은 오래된 고대도시에서도 사랑했습니다. 고대 아이깁투스(Aegyptus)의 부바스티스(Bubastis) 시민들은 키우던 고양이가 자연사하면 상복을 차려입고 눈썹을 깎아서 애도를 표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는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받아들여 ‘고양이 집사’를 자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찢어놓는 ‘도둑고양이’를 혐오했지만, 이제는 ‘길고양이’라고 부르며 꾸준히 먹이를 주며 돌보는 ‘캣맘’도 생겨나는 추세입니다. 아내도 최근에 일년 가까이 다닌 반찬가게에서 그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캣맘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파주 집에선 아침저녁으로 대문간에 사료와 물을 떠다 놓습니다. 비 오는 날엔 비닐우산을 씌어놓고, 겨울이 되자 미지근한 물을 바깥에 내놓습니다. 결국 우리가 돌보는 고양이가 집 안팎으로 족히 열 마리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시 반려묘를 모시고 있다는 김완은 “비와 바람, 여름 한낮의 열기와 한겨울의 바람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좁고 위험한 곳이라도 고양이의 안식처가 되고, 바로 그곳이 고양이의 사지(死地)가 된다”고 했습니다. 고양이들은 장마철에 주로 사망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비를 맞은 고양이들은 구석진 곳으로 피해서 추위를 견디다가 저체온증으로 죽고, 결국 그 썩어가는 냄새가 사람을 괴롭힌다고 김완은 말합니다. 그래도 그분이 수습한 길고양이는 사정이 나은 편입니다.

길고양이들은 위태로운 환경에서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누구의 구속도 당하지 않고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지붕처럼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서서 ‘흥, 인간쯤이야 내 발밑이지.’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내려다봅니다. 약해지면 목숨을 거두어가는 야생의 법칙은 피할 재간이 없지만, 최소한 길고양이들은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 자기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입니다. 그러나 철망 케이지 안의 유폐된 세계에서 죽은 고양이들은 가련합니다.

김완이 수습했던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죽은 고양이들의 상황은 끔찍했습니다. 두 개의 큰 철망 케이지 안에서 갇혀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려 털가죽만 남은 고양이들은 러시안 블루, 샴, 아메리칸쇼트헤어 등 귀한 품종이었습니다. 수북한 똥 덩어리와 함께 뼛조각과 털가죽이 온통 뒤엉켜 있는 고양이들의 시신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주인의 손길이 끊어지면서 지옥을 경험했다는 걸 알려줍니다. 혹독한 굶주림과 갈증,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 자기를 돌보던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엄습하면서 차례로 죽어갔을 것입니다. 김완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음 앞에선 냉정한 자연의 법칙이 적용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동물이 죽으면 어김없이 파리들이 꼬이고 그 죽음을 양분 삼아 번식하여 수많은 생명체를 부화시킨다. 사람이 죽은 곳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지구 생태계에서 구더기야말로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가장 역설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가난하면 외로워지고

특수청소 노동자 김완의 결론은 “가난한 이는 혼자 죽는다”는 거였습니다. 이른바 고급빌라나 호화주택에 고가의 세간을 남긴 채, 이른바 금은보화에 둘러싸인 채 뒤늦게 발견한 고독사는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달려간 죽은 자의 집에는 늘 가난과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합니다. 어떤 날은 죽은 이의 우편함에 꽂힌 채 아래를 향해 구부러진 고지서와 청구서마저 가난에 등이 휜 것처럼 보였다 합니다.

그는 자신을 “가난에 눈이 멀어, 혹은 가난에 눈이 뜨여 그 어떤 것에서도 궁핍의 냄새를 찾아내는 데 솜씨를 발휘하는 청소부”라 했습니다. 그가 보는 세계에서 빈익빈(貧益貧)은 일상적이고 지당합니다. 부익부(富益富)는 먼발치에서 그저 누군가 읊조리는 대로 들어만 봤을 뿐 일찍이 경험해 본 바가 없습니다. 가난은 가난과 어울려 다니며 또 다른 가난을 불러와 친구가 되고, 부는 부와 어울리며 또 다른 풍요를 불러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필연적으로 더 고독해집니다. 빈궁한 자에게는 가족조차 연락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옆집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의아하게 여긴 이웃의 신고로 주검은 뒤늦게 발견됩니다. 경찰은 그제야 사망의 원인을 규명하며 유족을 찾아 나섭니다. 고독사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는 ‘고독’이라는 감정 판단이 들어간 ‘고독사(孤獨死)’라는 말보다 ‘고립사(孤立死)’라는 사회적 표현을 공식용어로 쓴다고 했습니다. 허나 고독사를 고립사로 바꿔 부른들 죽은 이의 고독은 솜털만큼도 덜해지진 않습니다.

이런 가난한 자의 집에 넉넉하다 못해 넘쳐나는 것은 바로 우편물입니다. 체납고지서와 독촉장, 가스와 수도와 전기를 끊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미납요금 경고장, 경고한 대로 이제 공급을 중단했다는 최후통첩장이 우편함에 빽빽하게 꽂혀 있습니다.

김완이 청소한 청담동의 한 빌라에서 죽은 이의 흔적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살던 202호 현관문에는 ‘전기공급 제한 예정 알림’이라는 굵은 고딕체의 제목이 붙은 노란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인쇄된 예고장에 담당자가 사인펜으로 쓴 예정일자는 6월 15일, 건물관리회사에서 알려준 주검 수습 날짜와 겹칩니다. 김완은 “이 비정한 도시에서는 전기가 끊어지면 삶도 끝나는 것일까?” 묻습니다.

독촉이 이어지다 마침내 전기가 끊긴 날, 그는 사람 키보다 높은 냉장고 앞에서 목을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전기를 끊는 행위는 결국 죽어서 해결하라는 국가의 무언의 타살권유가 아닐까?” 비판합니다. 이 집을 청소하고서 김완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주로 가난한 이는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모든 죽은 이의 뒷모습은 처연하다

이참에 김완은 어느 현자가 있어 고독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사를 놓고 고민할 만큼 인간을 궁지로 몰아붙인 지대하고 심각한 문제들, 죽은 이의 마지막 순간, 마지막 머문 곳까지 찾아와 암울하고 축축한 얼룩으로 물들인 가난이나 외로움 따위는 죽음의 문을 넘는 순간부터 아무런 가치도 없어지고, 그 아무리 중차대한 것조차 하찮게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돼버린다면 참 기쁠 것 같다고 했습니다. ‘흥, 내 가난 따위야 잠시 머물다 가는 구름 같은 것일 테지’하며 가볍게 걷기를 희망합니다.

“가난하다고 너무 심각해지지 말자. 그대가 현자라면 언제나 심각한 사람이 손해라는 것쯤은 깨달았으리라. 어차피 지갑이 홀쭉하나 배불러 터지거나 지금 웃고 있다면 그 순간만은 행복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리워집니다. 그중엔 한참 전에 청춘을 흩뿌리고 떠난 친구도 있습니다. 말끝마다 “너는 내 머리고, 나는 네 심장”이라고 했던, 시인 이상을 좋아했던 그 친구는 수없이 많은 시를 썼지만 시인이 되지 못하고 공무원이던 아내 곁에서 암으로 죽었습니다. 내가 결혼할 때 수줍게 내민 선물은 금장을 입힌 탁상용 쾌종시계였습니다. 나는 그 시계를 지금도 갖고 있고, 지금은 시침이 돌아가지 않는데도 금장이 벗겨진 그 시계를 거실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학창시절엔 새벽에 문득 일어나 한 시간 너머 새벽길을 걸어서 그 집에 가고, 그 시각에 그 집에서 라면을 얻어먹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 길에서 신새벽 봉제공장 창문으로 날리는 먼지를 보았고, 거리를 쓰는 청소부를 보았습니다. 둘째 형이 마흔 네 살에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인천성모병원 현관 앞으로 하염없이 날리던 눈발도 기억합니다. 형은 위암으로 투병하다 얼마 후 형수와 두 딸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습니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라면 덜 하겠지만, 병으로 죽든 고독하게 홀로 남아 자살을 했든 모든 죽은 이의 뒷모습은 처연합니다. 쓸쓸하고 덧없습니다. 문득 한쪽 문이 닫히고 다른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을 때 느끼는 아득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아무도 동반할 수 없는 길에서, 죽어서야 평등한 세상에서 우리 삶이란 도대체 의미를 물을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하느님께 온전히 수납되기를 갈망했던 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이댈 생각은 없습니다. 나야 성자도 현자의 문간에 들어선 적도 없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분들이야 바깥창문으로 얼핏 보았을 뿐입니다. 이유야 어쨌거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겪었을 절망만 진실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병을 앓았던 이가 죽어가면서도 미처 버리지 못한, 진작 떠나간 아내가 예전에 보냈던 “To. 사랑하는 연민 씨에게”라는 편지다발만이 그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죽은 자의 집 청소>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겨우 알아차릴 뿐입니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공동선> 2021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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