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량미달의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보이는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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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량미달의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보이는 몸부림
  • 최태선
  • 승인 2020.12.27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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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그림 하나를 보았습니다. 교종의 사진과 함께 다음 글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또 다시 직업의식이 발동되어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가짜 그리스도인이란?
1. 자기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람
2.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세속적인 사람
3.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며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

가짜 그리스도인, 어쩌면 제가 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거나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짜 그리스도인을 지적하는 일이 선행조건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가짜 그리스도인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정말 본의 아니게 저는 칼럼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도무지 칼럼니스트로서의 자격이나 식견을 지니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글로 쓸 뿐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사실상 제게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수단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된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 저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소리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저는 그 소리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제 글을 읽고 제 글을 매체에 싣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2008년 처음 글이 실리기 시작했으니 무려 12년간이나 제 글이 실린 것입니다.

제 글이 실리기 시작한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런 웃기는 제 글이 12년이나 간헐적이지만 계속해서 실렸고 지금은 제 글을 싣는 곳이 세 곳이고 비정기적으로 실리는 곳도 몇 곳이 더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정말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는 말이나 글이 아닌 며칠 전 소개했던 시각장애를 가진 니콜스씨 부부처럼 말없이 하느님의 말씀이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쨌든 저는 제가 원치 않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다 보니 이 일이 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또 가끔이지만 제 글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할 일이 없어 매일 이렇게 글 하나씩을 쓰고 있습니다. 이 일도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시간도 생각보다 더 많이 소요됩니다. 실제로 글을 쓰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 보이지만 날마다 글의 주제를 정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주제에 맞는 소재를 위해 끊임없이 책을 읽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일은 그 시간과 상관없이 제게 늘 깨어서 생각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글은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나는 부분이고 물 밑에 감추어진 부분이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지만 제게 돌아오는 경제적인 소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글이 실리면 원고료를 받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저는 원고료를 받지 않습니다. 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다른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돈을 받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받는 경우는 돈을 받은 교회나 저희 교회에 헌금으로 드리거나 도와야 할 사람을 돕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글을 쓰고 돈을 받는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이 지금의 제 일이라고 생각을 해도 소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 일이 의미 있는 일이라 해도 결국 저는 무위도식하는 무책임한 가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겐 가장 힘든 일입니다. 무책임한 가장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아무리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의미가 없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의 생계비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가장의 책임은 언제나 죽음의 무게로 제게 다가옵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무책임한 가장 다음으로 힘든 일은 위에서 소개한 가짜 그리스도인 3번의 역할입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의 가장 많은 댓글은 찔린다는 내용입니다. 제 글은 언제나 사람들을 찌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3번 역할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 글에 호응하다가 떠나갔습니다. 아무리 찔림을 당해도 그 가운데서 그 찔림 때문에 결단하고 새로운 삶을 사시는 분들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번민만을 더하게 하는 역할로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는 탄식만을 하게 만들곤 합니다. 그래서 있던 관계마저 단절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아니 이미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3.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며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이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는 교종의(그분이 하신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분의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글을 보니 허탈감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달리 그 내용을 이해해보려 해도 딱히 정리되는 내용이 없습니다. 억지로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는 것을 말로만 설교하는 목사들의 태도로 이해해 보려 해도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종은 왜 그런 말을 하신 것일까요.

사실 예수님보다 더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신 분은 없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 가운데 어떤 것도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엄격한 기준 정도가 아니라 그분은 제자들에게 불가능한 것들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데리다 같은 사람이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라고 말했을 때 복음이 이해되었고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열정이 솟아났습니다. 그런데 불가능성도 아니고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말하는 것조차 가짜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라면 과연 진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배운 베드로 사도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복음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에게 강요하지 말고 자신부터 실천하라는 내용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실천하고 행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부 알려주고 전할 수가 있을까요. 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얽매여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가능한 것만을 실천한다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자기의에 빠져 위선자가 되지는 않을까요.

고민이 깊어집니다. 제가 들어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말대로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지 않으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짜 그리스도인을 낳을 수 있을까요. 어쨌든 바로 이 부분이 제 두 번째 고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저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제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결코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발적 동의’라는 말은 눈높이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동의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눈높이보다 높은 것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천은 자신의 눈높이 이상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통해서도 늘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높이를 낮추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영적 성숙은 요원하다는 것이 저의 복음 이해입니다. 눈높이는 예수님의 수준, 혹은 하느님의 수준(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수준에 맞춰질(제한과 한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그 실천을 통해 자신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질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수준을 향해, 예수님의 수준을 향해, 자신의 수준이 조금씩 높아질 것입니다.

이 일에서 동료의 인정과 이해는 절대적입니다. 동료의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다른 존재의 인정과 이해야말로 그리스도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가장 큰 조력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가 제 글을 통해 하고 싶은 일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미는 가짜 그리스도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가짜라는 말보다는 함량미달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함량미달의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보이는 몸부림을 보시고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저보다 나은 몸부림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시기를 오매불망 소망합니다. 제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이 여러분에게는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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