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자 마지막 아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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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자 마지막 아침처럼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2.15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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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by Martin Erspamer, OSB
by Martin Erspamer, OSB

교회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새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대에도 눈물의 골짜기에서 탄식이 그치지 않았고, 군중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새로운 하늘 새 땅을 열어 주시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분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은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분은 만인이 만인에게 형제이고 자매인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고,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대양 육대주에 교회가 건설되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승에서 낯선 이방인처럼 순례하는 백성들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대는 헛된 염불처럼 들리고,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교회 안에서도 가난합니다. 이승에서 버림받은 자는 교회 안에서도 불청객처럼 낯선 얼굴로 제대 앞에 앉습니다. 교회 안에서, 불행한 인생은 제대 위에 걸린 십자가 위에서만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주님이라 칭하며 찬양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외롭고 여전히 춥고 여전히 동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손을 꼽고 계십니다.

24세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김용균 청년이 태안화력발전소 석탄이송 컨베이어벨트에서 기계에 끼어 사망한 지 두 해가 지났습니다. 2018년 12월 10일 밤이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그이의 억울하고 참담한 죽음을 겪으면서, 저는 성탄절에 앞질러 사순절이 먼저 온 느낌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조롱처럼 들리고, 메시아를 가리키던 큰 별이 빛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23년째 산재사망 OECD 1위 국가라는 대한민국에서는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은 매년 2천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폭발사고, 용인 물류센터 화재로 최근에도 8명의 노동자가 숨졌으며, 택배 노동자들은 15명이나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은 빛을 잃은 것일까요? 여태껏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차 밝히지 못하는 정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권은 바뀌어도 가난한 민중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시대에 거대자본은 ‘경제회생’의 미명아래 면죄부를 받고 있는데, 동네에서 소상공인들은 죽을 맛입니다.

아울러 윤석열 검찰총장을 둘러싼 잡음을 지켜보며 대한민국에 정말 미래가 있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저는 윤석열 총장이 직무배제와 해임이 논의될 만큼 문제가 많은 공무원인지 여기서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검찰 문제가 코로나19와 쌍벽을 이룰 만큼 한 해 동안 내내 논란이 된 것 자체가 피곤할 따름입니다. 어쩌다 보니, 대한민국에 정치가 실종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이 검찰과 법원의 처분만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정말 검찰/사법권력이 대단하긴 한 모양입니다. 시시비비를 떠나, 제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윤석열 총장을 지지하겠다고 ‘모든 검사’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현상입니다. 제가 히틀러를 지지하던 나치를 떠올린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사람에 따라서 현실판단이 다를 수 있기에, 특정 검찰총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검사동일체’라는 요상한 원칙입니다. 대부분 검사들은 알게 모르게 상명하복을 당연시 하며 “우리는 한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비슷한 조직은 아마 군대와 가톨릭교회일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체화 된 군대조직, 그리고 진리를 수호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교계제도가 그것입니다. 명분이야 모두 좋지만, 이들 조직의 공통점은 조직 안에서 다른 의견/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가 가톨릭 문화와 영성에 심취하였지만 끝내 세례를 받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베유는 사회와 교회의 집단감정에 대해 염려했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판단을 문제 삼고 ‘일치된 의견’을 강조하는 전체주의는 세상과 교회가 빠질 수 있는 악마의 유혹이라고 베유는 보았습니다. 전체주의가 낳는 집단감정은 한 국가와 조직과 교회만의 영광을 위해 ‘사소한’ 차이를 무시합니다. 그들은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을 ‘비국민/조직에 위해를 가하는/반교회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배제합니다. 이런 집단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권력과 대세를 따라가야 합니다. 조직의 이익 앞에서만 나의 이익을 발견합니다.

베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처럼, 교회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마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답하는 데 늘 실패해 왔다고 말합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내 앞에서 나를 경배하면,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다”고 했다. 악마는 그 권세와 영광이 “내 것”이니 “내가” 누구에게든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과 교회는 권세와 영광을 탐하는 집단감정에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예수님처럼, 시몬 베유는 “나는 어떤 인간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으로 외따로 살아가게끔 예정되었다”면서 “여기 이 책상에 영원한 구원이 있어서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다 해도, 그 구원을 취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한, 나는 손을 내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든 꺼려하든 메시아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비국민이 될 것이며, 상식적인 종교를 반대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분의 다른 목소리 때문에 깨어 있는 사람들은 늘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웃사이더였고, 교회가 그분을 따르는 제자 집단이라면 이승에서 낯선 자로 살아가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가야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죽을 것입니다. 가톨릭일꾼들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다가올 아침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첫 아침이자 마지막 아침처럼 여기며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0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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