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국수집이 베푸는 축복은 밥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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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국수집이 베푸는 축복은 밥뿐이 아니다
  • 최태선
  • 승인 2020.12.13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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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저는 늘 민들레국수집을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그곳에서 날마다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노숙자 선생님들이 VIP 대접을 받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곳에서 먹는 것은 밥 한 끼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노숙자 선생님들은 사랑을 먹고 희망을 마십니다. 그냥 사람대접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곳에서 줄을 서지 않고 처음 온 사람에게 순서를 양보하면서 그분들은 사람(演技)를 합니다. 놀라운 환대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거들먹거리며 내는 후원금을 받지 않는 그곳에는 후원물품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쌀과 과일과 채소와 고기와 의복과 같은 물품까지 각종 도움의 손길들이 말없이 이어집니다. 기부금 영수증을 떼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물품들이 답지합니다. 노숙자 선생님들이 아닌 분들에게도 사람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품을 가져다 놓은 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말씀을 읽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푸는 분들을 보기란 어렵습니다. 물론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선은 그냥 구색맞추기 식의 일부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일부가 아니라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는 자선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과 마찬가지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가 생깁니다. 그것도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만일 예수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더라도 그는 가난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를 위한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가 생겼을 것입니다.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넘어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일로 하늘에다 재물을 쌓는 것이 가능합니다. 소유를 팔아 자선을 베풀면 그 재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습니다. 일상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이익의 차원에서 할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인 사고로 투자 대비 순이익의 증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고 그들에게 긍휼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이 일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은 결코 인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연의 순리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마음의 변화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민들레국수집이 의미 있는 것은 노숙자들에게 밥을 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노숙자분들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후원물품을 내려놓고 가시는 분들의 마음이 변화됩니다. 다른 곳에 후원물품을 할 때처럼 기한이 다 된 팔 수 없게 된 물품들을 땡처리하는 것보다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일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일을 하는 분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그분들의 사고의 변화를 추측해보겠습니다. 처음 그런 일을 시작했을 때는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집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작아집니다. 물론 품앗이로 섬기는 일에 도움이 되겠지만 노숙자분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더 큰 일들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숙자 선생님들이 살 집을 가지고 사람답게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되기도 하고, 더 많은 물품을 보내기도 하고, 더 많은 소유를 팔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더 커지고 자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행동이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그러면 그런 기부와 자선 행위가 그 사람의 일상이 될 것입니다. 민들레국수집을 돕는 것이 아니라 민들레국수집을 통해, 노숙자 선생님들을 통해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노숙자 선생님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분들은 처음에는 밥 한 끼를 얻어먹기 위해 왔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화석처럼 단단해져서 여간해서는 감동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한 끼 식사를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줄을 서지 않는 것도 처음 온 사람을 먼저 먹게 하는 것도 민들레국수집의 질서려니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줄을 서지 않으면서 자신보다 더 배가 고픈 사람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에게 먼저 먹을 수 있게 양보하는 법을 배웁니다. 처음 온 사람을 보고 자신이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며 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사실 노숙자 선생님들은 이곳까지 오게 되면서 많은 것을 이미 배웠습니다. 하지만 냉랭한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배운 것들을 활용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불쌍하게 여겨야한다는 것, 서로가 도와야 한다는 것, 누군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설 수 있다는 것 등등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망한다는 것을 세상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쫄딱 망한 자신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기꾼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많은 것들을 배우고도 마음이 단단해져서 그것을 마음 깊이 감춘 채 그 활용의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추어졌던 것들이 두꺼워진 마음을 뚫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노숙자 선생님들의 마음에도 봄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숙자 선생님들도 마음의 변화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민들레국수집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에게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봉사를 위한 봉사를 했습니다. 그 봉사가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그 봉사가 자원봉사자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허겁지겁 몇 번을 다시 밥을 먹는 노숙자 선생님들을 보면서 그분들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만일 자신이 노숙자 선생님의 경우가 되었다면 자신도 노숙자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노숙자 선생님들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봉사의 질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에서 가족들의 밥 한 끼를 준비하는 마음이 됩니다. 정성을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도 커집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노숙자 선생님들의 지독한 냄새도 잘 못 맡는 코를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변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아들을 보고 달려가 얼싸안습니다. 돼지우리 냄새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 냄새가 아픔일 뿐입니다.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의 마음도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원봉사자분들의 마음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늘날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곳이 또 있을까요. 또 있을 수도 있겠지요. 도로시데이와 피터 모린이 설립한 가톨릭 워커의 환대의 집이나 세이비어 교회의 수많은 공동체들에서는 이와 똑같은 마음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마음의 변화를 이뤄내는 곳이 참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곳들처럼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를 이뤄내고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대면 혹은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를 드리면서도 아무런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소유를 팔아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면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으로 오늘의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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