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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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겠다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 서영남
  • 승인 2020.12.06 2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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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남의 민들레국수집 일기]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민들레국수집에 오는 손님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에도 수저 부딪치는 소리뿐입니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손님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다. 대답은 아주 짧게 합니다. 먼저 인사하지 않으면 아는 체도 하지 않습니다. 노숙하는 손님들은 자기가 세상에 없는 존재인 줄 알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곁을 지나가도 못 본 체 그냥 가던 길을 갑니다.

어느 날 길에서 호진(가명) 씨를 만났습니다. 호진 씨는 동인천역 광장에서 지냅니다.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동인천 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반갑게 인사하면서 고맙다고 합니다. 길에서 고마운 분을 만나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아는 체도 하지 않고 그냥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동인천역 광장에서 무슨 짓을 해도 본 본 척 그냥 간다고 합니다. 자기는 투명인간이라 합니다.

민들레국수집 손님들이 매일 찾아오다 어느 날인가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잊힐 만하면 불쑥 나타나기도 합니다. 삐쩍 말라서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거의 한 달 만에 나타난 손님이 있습니다. 너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굶었다고 합니다. 도와 줄 일이 있는지 물어봐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와주겠다는 말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신세를 망쳤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남의 불행을 돈 버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며칠을 굶은 사람에게 천사처럼 다가가서 설렁탕 한 그릇 값으로 다시는 살아날 수 없게 밟아버립니다. 주민등록증과 인감을 받아서 순식간에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거액을 대출을 받아 챙기거나 바지 사장을 만들어 엄청난 세금을 받게 하거나 합니다. 그렇게 당한 우리 손님들은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우리 손님들이 도와주겠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처음 찾아온 손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조금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도와주겠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 삼십육계 줄행랑을 칩니다. 그래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우리 손님을 처음 만나면 절대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밥 한 그릇 편히 먹을 수 있도록 거들 뿐입니다.  민들레 희망센터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아주 천천히 친해져야 합니다. 노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찜질방에서 지낼 수 있도록 거들어줍니다.

한 달쯤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밥은 국숫집에서 먹고 민들레희망센터에서 책을 보면서 소일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여인숙이나 고시원에서 한두 달 지낼 수 있도록 거들어주면서 살 방법을 함께 고민해봅니다. 며칠 지내다가 사라지는 이도 있습니다. 고시원에서 또는 여인숙에서 지내다가 말도 없이 떠나는 이도 있습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민등록을 살리려고 하면 떠나기도 합니다. 신분을 밝히면 곤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기소중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벌금을 내지 못해서 경찰을 피해 다니기도 합니다.

그저께는 민들레 포장마차에서 오후 늦게 찾아온 손님에게 어묵을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956년 4월이 생일인 남자 어른입니다. 부평 역에서 노숙을 합니다. 가족은 몇 년 전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수입이라곤 국민연금 십만 원 받는 것이 전부랍니다. 내년 4월이 되면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그때는 형편이 좀 나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안을 했습니다. 겨울은 그냥 노숙하면 정말 힘듭니다. 그러니 민들레국수집 근처에 있는 여인숙에 방 하나를 구해 주겠습니다.

내년 4월에 기초연금이 나오면 그때는 스스로 방세를 내면 좋겠습니다. 조건이라곤 넉 달 간의 여인숙 방세는 나중에 손님이 큰 부자가 되면 열 배 스무 배로 갚겠다고 약속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고 토요일에 와서 대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토요일에 손님이 찾아오면 참 좋겠습니다.
 

서영남 베드로
민들레국수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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