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이든 우리든 똑같은 도토리일뿐
상태바
이재용이든 우리든 똑같은 도토리일뿐
  • 최태선
  • 승인 2020.12.03 1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선 칼럼

무엇이든 흔한 것은 귀하게 여겨지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제가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매일 글을 써서 그것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늘 새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 소리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듣는 것처럼 지겨운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제 글을 읽는 분도 피로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읽는 분들에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급적 글을 가끔 써서 올리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게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제게 다른 일이 주어졌다면 저는 그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게 주어진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마다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저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이 흘러야 합니다. 생각이 흐르는 것이 사실은 묵상입니다. 그렇게 저는 날마다 묵상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묵상은 그냥 생각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곱씹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관점으로 성서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책은 제게 중요한 통찰의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책을 읽고 신문(지금은 뉴스)을 읽고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세상과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들을 얻는 것입니다.

사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것은 성서를 읽을 때보다 더 생생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세상을 아는 것은 곧 복음을 아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훈련을 하는 분들이 기본처럼 여기는 바보상자를 오히려 지혜상자로 여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드라마 작가가 목사보다 더 생생한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합니다. 백소영교수는 드라마를 보고 쓴 글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신앙은 결코 게토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통전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모든 것이 어떤 것에 의해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무언가를 안 하는 것(금기)을 신앙의 모토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앙이란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가(佛家)에는 그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파계(破契)입니다. 그런데 그 파계가 단순한 파계가 아니라 득도의 과정입니다. 그리스도교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파계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는 순간, 자신이 그동안 공들여 쌓아놓은 탑을 허무는 순간 그 사람은 더 큰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에도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사실은 작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효대사의 이야기 가운데 있는 파계를 보고 그분이 위대한 불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가 거지들과 살면서 양지에 앉아 옷을 벗어 이를 잡는 모습이 제 마음속의 심상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득도한 고승이 거지들과 함께 사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본입니다. 거지들과 이를 잡으며 하나 되는 모습은 정말 존경스러운 모범입니다. 만일 우리 시대 대형교회를 이룬 목사가 거지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그리스도교가 된다면, 교인들에게 이끌리는 교회가 된다면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왕이신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자캐오의 이야기는 그냥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자 관원의 이야기의 후편입니다. 깨끗한 부자의 재물이든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이든 그것은 모두 불의한 재물일 뿐입니다.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 므나를 남기고 다섯 므나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이재용이 부자이고 우리는 부자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인간은 모두 한 므나를 소유한 똑같은 도토리들일 뿐입니다. 오직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만이 주님께 칭찬을 받는 선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 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이미 사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원효가 보인 모범이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교는 정답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특히 개신교는 교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그리스도교가 되었습니다. 교리를 놓고 싸우고 갈라지는 역사가 개신교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인생의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답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정답이 없는 인생에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입니다. 개신교에도 그 사랑이 교리를 압도할 수 있을 때 참 종교로서의 개신교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며칠 전에 만난 목사님도 ‘이신칭의’를 부정하는 듯한 제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표정으로 드러냈습니다. 저는 이신칭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신칭의는 절대적인 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이신칭의를 부정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여전히 아직도 제가 하는 이야기가 못마땅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앎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는 자신의 습관을 보실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앎으로도 친구를 사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사역을 방해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반역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불가(佛家)의 ‘파자소암’(婆子燒庵) 이야기가 다시 생각납니다. 바위처럼 여인을 품어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스님은 고승이 아니라 땡초입니다. 오래 전 대천덕 신부님의 하신 말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자신이 젊은 여인을 만날 때는 주의한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감정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풍성해지는 일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교가 경박해진 것은 바로 이 생명으로 풍성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게토가 생겨났고 교회생활이라는 진리의 게토화가 생명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무미건조한 땡초들의 세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불을 질러 태워버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중학교 때 읽은 <데미안>은 제게 아직도 생생하게 심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새가 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깨고 나와야 합니다. 누군가 그 작업을 도와준다면 알에서 나와도 날 수 없는 새가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들을 알 속에 가두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 알을 스스로의 힘으로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 일이 파계(破契)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파계의 순간 드높은 창공이 보이고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의 창공을 높이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저는 보고 싶습니다. 참된 신앙은 교회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그렇다고 광화문 광장으로 나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으로 나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의 세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럴 때 정신을 차려서 베드로처럼 초막을 지으려 하지 말고 빛으로 드러나는 ‘산 위의 동네’의 역할을 기억한다면 기독교는 다시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하느님의 경륜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일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