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의 경제는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삶의 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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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의 경제는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삶의 릴레이
  • 최태선
  • 승인 2020.11.22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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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아는 목사님 가운데 강화도에서 목회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게 쌀을 보내주셨습니다. 강화 쌀은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런 쌀을 제가 받았습니다. 쌀을 받고 아내는 얼른 그 목사님의 주소를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답례로 무언가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답례로 무언가를 반드시 보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늘 답례를 기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서도 우리가 무엇을 받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어딘가 불편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보다 더 비싸고 귀한 것을 답례로 보내고 난 후에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해진 후에도 여전히 기를 쓰고 예전의 삶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호하게 아내의 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답례를 안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는 것을 평생 연습해왔습니다. 그런데 주는 삶을 살다보니 받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주는 것이 어렵지 받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희에겐 받는 일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문화만이 아니라 기독교문화 역시 이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답례로 그것을 상쇄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의 삶이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최근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복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 복은 그야말로 복의 총화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무언가를 구하는 (결핍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황금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황금률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황금률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는 물론 자신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비축해야 하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재산이 아니라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세상 문화와 기독교 문화 모두를 장악하고 있는 주는 삶을 살려는 욕망이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누군가를 돕는 삶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라는 사고가 기독교 문화 전체를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돈을 많이 벌어 그 중 일부를 남을 돕는데 써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채의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총화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광스러운 은혜를 거저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거저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채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갚아야 하는 삶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그것은 부채의식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거저 주고 거저 받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돈이 흐릅니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적게 가진 자를 만나면 자신의 것을 흘려보냅니다. 둘의 경제상태가 똑같은 수준이 될 때까지 더 많이 가진 자의 것은 더 적게 가진 자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어쩌면 농심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밤에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몰래 자신의 것을 가져다 놓는 일이 반복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동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역동성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부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복이라는 말을 들어 그것이 뇌리에 박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복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부채의식이 없는 의무란 자발적인 행동임과 동시에 그것이 기쁨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할 수밖에 없는 행위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행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는 좋은 반면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고 몰두하느라 법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초대를 받았지만 종말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간다면 그리스도인들 역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의 잔치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거저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채의식이 없는 의무를 기쁘게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갚을 수 있는 사람인지 갚을 수 없는 사람인지를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만나면 거저 주면 됩니다. 거저 받은 사람 역시 받은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님의 글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녀님이 쌀이 떨어진 집에 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자 쌀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쌀독에 절반을 쏟아 부은 후에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이웃의 집을 향했습니다. 그 집도 쌀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쌀을 가져다 준 테레사 수녀님도 존경스럽지만 이웃에게 쌀을 가져간 그 가난한 사람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그 가난한 사람이 받은 쌀은 며칠 양식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먼저 생각했다면 나눌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당장 자신과 같이 굶고 있는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사람과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믿는 사람은 이 사람처럼 살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아내도 이번에는 쌀을 받고 답례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쌀을 나눌 것입니다. 물론 보내준 쌀의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받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아무리 어려워도 나누는 삶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아내가 받는 법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경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경제는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삶의 릴레이입니다. 그 릴레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는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이 예배가 바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예배일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돈, 이것이 이 예배의 표지입니다!! 오늘부터 당장 이 예배를 드리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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