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형제애가 남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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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형제애가 남아 있다면
  • 최태선
  • 승인 2020.11.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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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종이 신문을 안 읽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아직도 종이신문을 읽는 분이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칼 바르트가 그리스도인들이 성서와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신문을 읽는 사람이 없어져서 기독교가 이토록 허약해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코로나로 휘청거리는 교회는 집에서 기르는 닭과 같습니다. 야생성을 잃고 주는 먹이와 항생제로 살게 된 닭들에게는 면역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류독감이 걸리면 모두를 살처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기르더라도 방목을 한 닭들은 조류독감에 걸려도 좁은 곳에서 살던 닭들과 달리 면역력이 있어 살처분 하지 않아도 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그렇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교회는 가정교회가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결론을 제시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가정교회와 같은 교회를 오래도록 해왔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를 가정교회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권토중래를 꿈꾸는 과도기적인 과정 속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의 교회로서의 가정교회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구역모임 활성화가 가장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는 분석을 보았습니다. 맞는 분석입니다. 대형교회의 한계인 공동체성을 구역모임을 통해 구현해냈다는 점에 있어 그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소모임의 활성화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지난 후 백 년도 안 되어 교회는 다시 성직매매와 각종 타락이 난무하는 이전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교회보다 더 문제가 많은 교회들이 되었고 슈페너는 그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경건주의라는 재개혁을 시도하야 했습니다. 그 재개혁의 방식은 피아데스데리아라는 소모임의 활성화였습니다. 피아데스데리아 역시 초기교회와 마찬가지로 적은 인원이 가정에서 모이는 방식이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교회의 공동체성이 현격하게 사라집니다. 개인이 사라지면 유기체이어야 할 교회가 조직이 됩니다. 2세기 이후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교회가 변질되었던 것과 같이 일단 교회가 조직이 되는 순간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는 한결같은 현상이었습니다.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구역모임이 활성화되었고 마침내 아예 ‘셀처치’라는 교회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것은 결국 대형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정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악마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분하기가 현실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가장 비슷한 것이 가장 사이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교회가 가정교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설교를 하면서도 이렇게 적은 무리에게 세계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담긴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전 세계는 물론 우주의 가장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저의 설교가 우리 교회가 가정교회가 아니었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는 공교회로서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암세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고백하는 신앙고백에는 공교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거룩한 공회’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들은 거룩한 공회,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세상의 모든 교회의 지체라는 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면서도 공교회(Catholic 혹은 Universal Church)의 의미를 아는 그리스도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아무리 개신교가 프로테스탄트들의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들 간의 긴밀한 교제가 없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긴 설명의 필요 없이 오늘날 개신교교회는 철저히 개교회주의를 따르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저는 복음이 말하는 형제애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자매와 형제들입니다. 실제로 초기교회에는 그들을 자매와 형제로 이어주는 형제애가 있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가장 위대한 것은 형제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은 지식보다 영화롭고, 예언보다 놀라우며, 다른 모든 은사보다 숭고합니다.”

속사도인 이레니우스의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형제 사랑의 은사가 바로 형제애입니다. 사실 이 형제애가 초기교회 형성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들의 형제애가 로마를 이겼습니다. 로마의 권력과 자유와 풍요도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쳤던 평화(평안)의 비결은 바로 이 형제애였습니다. 형제애가 실제로 작동했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극한 가난을 견딜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더욱 끈끈한 형제애를 함양할 수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모든 요구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 형제애 없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형제애를 통해 서로를 섬기고 사랑했기 때문에 박해와 모진 환난을 딛고 자기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형제애로 형성된 교회는 다른 교회들 역시 자기들 교회와 똑같이 혹은 더욱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공교회라는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교회 네 교회는 없었습니다. 모든 교회는 공교회로서 혹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였습니다.

결국 형제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교회의 교회됨을 망각하게 만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그러면 당신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가족이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인 교회, 다시 말해 성령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되었는지 아닌지를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 가족의 지향점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오래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정말 많은 것들을 겪고 배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마운 것은 실제로 기독교 역사의 흐름 속에 그런 공교회들이 존재해왔고, 지금도 그런 교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미시와 메노나이트와 헤른후트와 모라비안 그리고 브루더호프와 같은 교회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시대 한복판에도 그런 교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아나뱁티스트가 아닙니다. 그런데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아나뱁티스트 교회들과 형제교회임을 선언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교회의 확인이었습니다.

만일 교회가 정말 교회라면 개교회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닥쳤던 기근을 위해 금식을 하여 모은 돈으로 연보를 하였던 마케도니아와 그 인근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코로나로 위기에 처한 교회를 자기 교회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고 보호하려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보여야 합니다. 혹자들은 분당우리교회의 예나 부산 일부 교회의 예를 들며 그런 시도들이 지금도 있다는 주장을 하려 할 것입니다. 귀한 일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한 교회가 그런 일들을 했기 때문에 고사하거나 사라졌다는 소식을 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형제애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All mine to give>라는 영화입니다. 수십 년 전에 보았던 영화입니다. 벌목장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었습니다. 아버지를 간호하던 어머니도 감염되어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는 대책 없이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장남이 한 아이, 한 아이씩 다른 가족에 입양을 보냈습니다. 썰매에 태워 모든 아이들을 다 입양시켰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입양된 가정들을 돌며 장남은 살을 에는 삭풍 속에서 동생들을 바라봅니다. 아이들이 따뜻한 곳에서 새로 생긴 부모들로부터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이 창을 통해 보입니다. 장남은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 영화의 제목이 "All mine to give"입니다. 그것을 “내 모든 것을 다주어도”라고 번역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애는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그것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형제애입니다. 가정교회를 말하기 전에 이 형제애를 살려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했고 그래서 속사도들과 교부들이 강조했던 그 형제사랑을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다시 살려내는 교회를 꼭 이루고 싶습니다. 샘물처럼 형제애를 흘려보내는 교회들이 강을 이루어 마침내 모든 교회를 살려내는 성령의 역사를 꼭 보고 싶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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