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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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고통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1.15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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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5

살다 보면 참 다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되고 또한 헤어진다. 설 전에 양수리 사는 선혜 누님 댁에 놀러 갔다가, 그 막내오라버니를 만났다. 그 가족들은 불연(佛緣)이 깊어서 큰오빠도 스님이시고, 막내인 선혜 누님도 본래 스님이셨는데 예전에 다녀온 청도 운문사에서 5년여를 도반(道伴)들과 머물며 수행했다고 한다.

선혜 누님은 이젠 속가(俗家)에 살며 환경운동에도 동참하고 사람들의 몸을 돌보는 일이며 마 음의 짐도 덜어 주면서 살고 있다. 그분의 막내오빠는 제재소 사업도 하고, 지금은 목수 일을 배워 집 지으러 다니신다는데, 집이 경주였다. 처음 만나 통성명을 하고 나니, 불국사 앞 우리 아파트 인근 토함산 끝 자락, 말방(末方)이란 산골에 살고 계신다 했다. 인연이 인연을 낳고 이런 인연이 또한 다른 인연을 낳는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설을 지내고 경주에 온 뒤로 눈이 펑펑 오고 그친 다음날 아침, 그 오빠 되시는 분이 전화를 하셨는데 놀러 오라는 것이다. 눈을 뜨고 산골을 덮은 백설 무더기에 정신없이 마음이 환해진 그분이 퍼뜩 우리를 생각해 내시고 전화를 주신 게 너무도 고마웠다. 진입로를 열어두기 위해 쌓인 눈을 포클레인으로 치우셨단다. 산속에 지어놓으신 집은 기대 이상이었다. 개 키우던 조립식 창고를 개조하여, 전통 찻집 같은 그윽한 공간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집이 곧 그 사람”이라던 건축가 김진애 씨의 말이 정답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편안했다. 그리고 이렇게 편안한 관계를 이어준 세상에 감사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화제 끝에 ‘절(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절간 같은 이 집에서 절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창 술에 담배에 찌들어 살았는데, 어느 순간 만났던 분이 매일 100일 동안 삼백 배(三百拜)를 해보라고 권하더란다.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생각하던 차에 마음 먹고 하루에 삼백 번씩 절을 하였단다. 술에 곤죽이 되어도 절은 하고 잤다는데, 열흘 정도 남기고 일거리가 생겨 집을 뜨는 바람에 100일을 채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절을 하는 동안, 먼저 체중이 9킬로그램이나 줄었고 혈색이 맑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랴! 생활이 정돈되고 마음이 정갈해지고……, 하였으리라.

예전에 숭산 스님이란 분은, 세상사에 찌들려 몸 고생 마음 고생하는 사람에게 절을 권했다 한다. 백 배, 천 배, 만 배 하는 절은 ‘깨끗한 고통’이라 했다. 같은 고통이라도 이런 고통은 사람을 망가뜨리지 않고 안에서 힘을 곧추세우게 돕는다고 한다. 절은 처음부터 바닥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하라는 소식을 전하고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지혜로운 눈을 준다.

불교식으로 절을 하려면 먼저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하고 손바닥을 뒤집어 제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받들어 올려야 한다. 그래야 두 손 모으고 무릎부터 일어나 곧추 설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가 절이며, 세상을 위해 자신을 봉헌할 의지를 드러내는 게 절이며, 갈라진 두 손을, 두 세계를 일치시켜 곧게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게 절이다. 그렇게 인생을 새로 살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다짐하며, 절을 하는 내내 땀 흘리며 서약을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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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말하고 싶었던 단식도 그러한 것이리라. 모든 교리와 아집과 이권과 욕심을 버리라고 밥을 굶는 것이 단식이다. “내가 곧 너이므로, 나는 없고 너만 있다”는 심정으로 제 가진 바를 비워서 남의 밥 그릇을 채워 주자는 것이 단식이다. 그런 단식이 아니면 거두어 치우라는 게 예수의 역설이다. 마음으로만 복을 빌어 주는 게 아니라, 몸으로 깨끗한 고통을 바쳐가며 거듭 다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살다 보면, 단식해야 할 때가 있고, 먹고 즐겨야 하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단식은 혼자 남몰래 티 내지 말고 하고, 먹을 때는 더불어 즐겨야 한다. 잔칫집에선 술을 받아 주고, 초상집에선 삼가 위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때를 분간하는 법일 텐데, 예수의 길을 잘 살피면 그 지혜도 얻지 않을까.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세상을 위해 탄식할 줄 아는 의로운 사람이 동무들과 더불어 기뻐할 줄도 안다는 이치뿐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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