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진실은 언제나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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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진실은 언제나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있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1.10 21: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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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불꽃을 피운 성자, 시몬 베유-1
[완전한 순수 시몬느 베이유], 다나베, 다모쓰, 김은숙 번역, 도도, 1991

나도 모를 경로를 통해 내게 들어온 책이 있다. 다나베 다모쓰가 지은 <완전한 순수 시몬느 베이유>(도도, 1991)이다. 이 책이 부미방의 전사 김은숙이 번역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서둘러 김은숙의 이력을 찾아보았다. 위키백과에 나온 이력만으로도 김은숙이 시몬 베유를 번역했다는 사실은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 역시 이승에서 베유처럼 영원한 순수를 찾아 나선 길이었을까?

김은숙 에스더
김은숙 에스더

김은숙 에스더는 1958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1977년 고신대 기독교육과에 입학했다. 1980년 5월에 있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묵인하고 비호했던 미국에 대한 항의로, 대학 4년 재학 중인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켜 구속되었으며, 1심 무기징역, 3심에서 10년형 확정되어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 1983년 5년으로 감형되어 5년 8개월을 복역하고 1986년 8월 15일 가석방되었다.

김은숙은 부산 봉래성당 밀알야학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던 중 동기생인 문부식을 다시 만나고, 방화사건 이후 각각 군입대 및 노동현장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사건이 의외로 커지면서 둘은 일단 도피하기로 했다. 원주교육원에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최기식 신부에게 찾아가 은신하던 중 자수하고 구속되었다.

1986년 출옥 후 곧바로 마창지역 노동자 외곽조직에서 교육사업을 하다가 1년 만에 서울로 올라와 구로지역 노동야학을 운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가입해서 백리를 가는 꽃향기라는 뜻인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펼쳐보는 이슬람〉 〈밥 딜런 평전〉 〈흑색수배〉 〈아프리카 소녀 나모〉 〈꿈길의 요술램프〉 등 20여 편의 번역서를 냈다. 가정도 꾸렸으나 이혼한 후 두 딸을 홀로 키웠다. 야학과 노동자 자녀를 돌보는 일을 하면서 ‘제5회 오월어머니상’을 받았다. 1995년에는 첫 장편소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를 발표하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종로구 창신동 지역아동센터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대표교사로 지냈다.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입원했으며, 임수경은 그 사실을 트위터로 알리고 후원 모금을 시작했다. 2011년 4월 6일 병원 로비에서 ‘김은숙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김은숙에게 사랑과 희망을’이 열렸다. 2011년 5월 24일 아침 7시 50분경 출혈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성남 삼성공원묘역에 묻혔다.

학창시절까지는 장로교 신자였으나, 이후에는 천주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에스더였다. 구약성경 에스테르(Ester)기의 주인공이다. 에스텔이라고도 부른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임금 시절에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 했던 하만을 몰락시키고 유대인들을 구출한 유대인 출신의 왕비가 에스테르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기리며 ‘푸림절’을 지낸다. 푸림절에는 에스테르기를 낭독하며 무명의 가난한 처녀에서 왕후로 발탁된 에스테르를 통해 하느님이 어떻게 당신 백성에게 개입하시는지 기념한다. 이날 사람들은 서로 친교를 나누며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곤 했다. 하만을 고발하기 위해 임금 앞에 나가며 에스테르는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에스 4,16) 하고 말한다. 김은숙과 에스테르와 시몬 베유가 만나는 꼭지점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시몬 베유의 친구였던 알베르티 테브농 부인은 “시몬 베유의 삶은 완전한 순수로 아로새겨져 있다.”고 했다. 철학교사가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살고, 허약한 몸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병으로 참여하고, 신비가로서 나치에 맞서는 자유프랑스 정부에 투신하다 영양실조로 죽은 여성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다. 다나베 다모쓰는 “이 순수가 불화살이 되어 우리 몸을 불태우려는 각오가 없고서는 베유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만큼이나 시몬 베유라는 불꽃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하다. 베유는 ‘나’를 완전히 태워 ‘없음’으로 진입할 것을 요구하며, 그때에야 하느님께서 내게 다가오신다 믿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

파리 룩셈부르크 공원에서 몇몇 학생들이 웃고 떠들며 공원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데, 큰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은 한 여학생이 낮은 구두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날카로운 눈을 반짝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너희들은 그렇게 웃을 수 있니? 중국에서 고통당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중국에서 장체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면서 많은 이들이 학살당하던 시절이었다.

<제2의 성>을 지은 동창생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시몬 베유를 “세상 어디에 가더라도 언제든 탄식할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고 말했다. 시몬 베유는 다른 이들의 불행을 그대로 자신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과 뛰어난 주의력으로 깜짝할 사이에 불행의 단편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그 밑바닥에 잠재한 통증을 스스로 같은 무게로 느끼려 했던 사람이다.

시몬 베유는 1909년 2월 3일에 태어났으며, 파리 동쪽 스트라스부르 거리에 살았다. 의사였던 아버지처럼 불가지론자였던 오빠 앙드레는 <팡세>를 지은 파스칼만큼 천재적인 수학자였다. “진리가 아닌 인생을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베유는 평범한 자신을 한탄했지만, 나중에는 천재들만이 진리의 왕국에 들어가는 시민권을 얻는 게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수개월에 걸친 지옥 같은 고뇌를 겪은 뒤에 알았다. 어떤 인간이든 천부의 재능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도 만약 그 사람이 진리를 갈망하고 진리에 닿기 위해 끝없는 주의력을 가진다면 천재에게만 예약된 진리의 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얼굴선이 가냘프고 품위 있게 생긴 베유는 아몬드 같은 눈을 가졌으나, 이후 진리에 대한 갈망 때문에 과도하게 외모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꺼운 안경과 까칠하고 딱딱한 표정은 마치 여성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유의 삶에 비장함을 더해준 것은 혈행장애로 빚어진 심각한 두통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수학능력을 지녔지만 허약한 체질과 두통으로 몸을 부려 하는 일에는 언제나 서툴렀다. 나중에 공장생활을 하거나 스페인 내란에 참여했을 때도 기계를 조작하거나 총을 다루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의지력으로 장애를 극복하려고 베유는 럭비팀에 들어가 진흙탕에서 뒹굴기도 하고, 공부만큼이나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베유는 자신처럼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본능적으로 공감하였으며, 대다수 사람들이 괴로워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베유는 “진실은 언제나 고통 받는 자의 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알랭(Emile Chartier)
알랭(Emile Chartier)

학창시절: 알랭의 철학과 사회적 관심

시몬 베유는 앙리4세고등중학교와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면서 <행복론>의 저자이며 알랭(Alain)이란 필명으로 유명한 에밀 샤르티에(Emile Chartier, 1868-1951)를 만났다. 알랭은 베유에게 칸트나 스피노자 등의 책을 한 페이지씩 뜯어서 흰 종이에 붙이고, 그 여백에 독서노트를 써나가게 했다. 종이는 클수록 좋았고, 여백을 채워나가는 동안 치우침 없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알랭은 늘 환상 속에 사는 자를 부르주아라 하고, 실제적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늘 이들에게 기만당하는 자들이 프롤레타리아라고 했다. 사제와 교사 등 설교만 하는 자들을 경멸했던 알랭은 경제적 변혁을 맹신하는 사회주의자도 비판했다. 알랭은 정치적 급진주의란 언제든 압제의 길로 추락할 수 있는 권력에 민중의 편에서 저항하는 것을 뜻했다. 1차 세계대전에 일어나자 사병으로 전쟁을 경험하고 “전쟁은 젊은이의 영웅심을 부추기는 올무”라고 비판했다.

알랭은 스탕달처럼 하루에 두 시간은 무엇인가 읽고 쓰도록 가르쳤다. 글쓰기를 할 때도 한 번 적은 글은 고치지 말라고 했다. 글쓰기를 통해 더 깊은 사색과 명료한 의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휘갈겨 쓰는 글씨도 경계했다. 정성껏 글씨를 쓰는 습관은 무모한 열정을 삭히고, 쓰고자 내용에 정신을 집중하도록 만든다. 호메로스의 시와 플라톤을 성경처럼 읽었던 알랭은 <정의집>에서, 정신은 “육체를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육체가 부들부들 떨 때 도망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고, 분노로 타오를 때 세차게 때리는 것을 거부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거부하고, 욕망으로 타오를 때 소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완전한 거부를 “거룩함”이라 했다. 베유에게 집단적인 것의 우상적 성격을 가르친 것도 알랭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신이란 권력을 거부하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사범학교 교장은 뒤르켐 학파의 부글레였다. 그가 베유에게 ‘붉은 처녀’라고 별명을 붙였다. 베유가 이 학교 졸업생인 로맹 롤랑이나 샤르트르와 함께 ‘지식인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부글레 교수는 사회운동에 공감하지 않았고, 간혹 베유가 모금운동을 하러 찾아가더라도 20프랑을 건네주며 자신의 기부를 익명으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날이면 며칠 후 교실 흑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모범으로 삼아 익명으로 실업자 구제기금에 기부를!” 베유는 급우들과 ‘노동자대학’에도 참여했다. 철도종업원을 대상으로 교양강좌를 열었는데, 이 경험으로 베유는 노동자들도 바르게 가르친다면 플라톤이나 칸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30년 베유는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졸업논문을 써서 지도교수였던 블랑슈비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 논문에 20점 만점에 10점을 주었고, 알랭은 곧바로 블랑슈비크에게 찾아가 “10점이라니, 베유에게 0점을 주든지 18점을 주든지 해야지!”라며 항의했다. 베유는 1931년 7월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때 수험생 107명 가운데 11명만이 통과했다.

교장인 부글레는 이 붉은 처녀를 프랑스 남부의 벽지인 르퓌의 여자중학교 철학교사로 발령을 냈다. 교사로서 베유는 학교 측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베유는 커리큘럼이나 교과서를 밀어두고, 주의력을 집중하는 걸 학습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생들은 상급학교 진학률이 낮았지만, 학생들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만큼 친근한 교사로 기억한다. 휴일이면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야외에서 학생들에게 음료수를 사주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게 호소하는 언어를 지닌 교사는 연애와 재능과 취업 등 학생들의 더없이 귀중한 인생을 인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제자들의 노트에 남아있는 아포리즘 같은 강의록은 베유의 특별한 시선을 엿보게 한다.

“농부는 더 넓은 토지를 갖고 싶어 한다. ... 상인은 가게를 확장하기 위해 상품을 팔고, 공장주는 공장을 확장하려고 일한다. ... 사람은 얻고자 하는 성공을 목표로 살아간다. 만약 ‘어떻게?’라는 물음이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할 만한 상황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역시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어간다.”

“노동은 우리를 꿈에서 현실로 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혼이란 합법적인 매음이다.”

 

*이 글의 축약본은 <가톨릭평론> 2020년 11-12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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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대 2020-11-15 05:35:09
감탄하고 감동했어요. 아름다운 글(모르기에 모르는 것들을 대하게 돼서 기쁘고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