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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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1.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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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김성동, 청년사, 2002

다락에 올라갔다가 문득 발견한 책이 김성동이 지은 <염소>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큰형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누나가 아무래도 오늘 밤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 밤 11시 가까운 시간에 조카에게서 큰누나를 서산 중앙병원 영안실로 옮기기로 했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내일은 서산에 가야 했고, 미루었던 원고를 오늘밤 마무리 지어야 장례를 온전히 치르지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염소>는 2002년판 개정판입니다. 내 기억으로 1981년 초판본은 백제출판사에서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김성동이 절집에서 쓴 것을 환속해서 다듬어 낸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합니다.

20년 만에 <염소>로 제목을 바꾸어 새로운 장정으로 낸 책을 다시 20년 만에 읽고 살펴봅니다. 초판본은 아내가 언질도 없이 친구에게 주는 바람에, 역정을 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아끼던 책이었으니 당연합니다. 저는 개정판을 받아보고서, 왜 제목을 바꾸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김성동은 이 글이 소설인지 동화인지 수필인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는데, 제목으로는 동화에서 소설로 바뀐 분위기입니다. 이 글은 김성동의 글과 정준용의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주 오래 깊디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가출과 출가 사이

김성동 작가(사진출처=오마이뉴스)
김성동 작가(사진출처=오마이뉴스)

김성동은 고등학교 시절에 제게 영향을 준 몇 안 되는 소설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만다라> 때문이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지닌 부처의 목각을 하면서 “중생들이 모두 고통 받는데, 부처인들 온전할 수 있겠냐?”던 지산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하느님을 ‘근심하는 분’이라고 했고, 루이 에블리는 ‘인간에게 기도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은 교리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라 연민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런 생각을 발견하게끔 부추긴 것이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였습니다. 그 후 김성동의 <피안의 새>와 <부치지 않은 편지>를 탐독하면서 잠시 제 눈매가 깊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그래요, 제가 격월간 잡지 <공동선> 편집장을 마치고 시골에 사는 동안, 편집회의 차 서울에 올라와 그분을 직접 뵈었습니다. 김성동 작가는 김사인 시인과 함께 편안한 눈매로 저를 바라보았던 걸 기억합니다. 나중에 경인 미술관에서 한 번 더 뵈었는데 고맙게도 저를 단박에 알아보더군요. 평생 두 번 만난 그분을 흠모하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무주에 살던 시절에 만난 인연 가운데 작가 공선옥이 있지요. 춘천에 살 때는 집으로 찾아간 적도 있는데 담양으로 간 이후론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집에서 김성동이 공선옥 작가에게 보낸 편지를 본 적이 있는데, 겉봉에 ‘공선옥 보살님’이라 쓰여 있더군요. 참 김성동스러운 표현이구나, 싶었습니다. 김성동은 성품이 어린이와 같고, 품새는 선비와 같고, 사상은 타협 없이 일갈하는 선승을 닮았습니다. <천자문>이라는 책을 내셨을 때는 달게 그 책을 읽으며 웃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을 떠올리게 하는 <천자문>의 본문 하나를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그분이 개신교에서 세운 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랍니다.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성경을 가르치시던 시간이었다지요. 심판의 날이 오면 악인을 멸하고 의인을 구하러 천사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고 하셨답니다. 그러자 우리의 김성동 청소년은 대뜸 질문을 한 거지요.

“저 거시기 ... 운등치우(雲騰致雨)하고 노결위상(露結爲霜)이라구 헸넌듀.”
“뭬야?”
“땅 위의 짐이, 거시기 수증기가 하늘루 올러가서 이뤄진 게 구름이라구 헸넌듀.”
“.......”

말인 즉, 찬물이 증발해서 생긴 게 구름인데, 그 구름을 타고 내려오면 천사들이 고뿔에 걸리지 않을라나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결국 교장의 고함소리가 터지고, 김성동 청소년의 볼따구니에 불이 났습니다. 독성죄(瀆聖罪)로 변소청소를 하다가 사흘 만에 그만 두고 가출하였다 합니다. 그때 탄 기차가 목포로 향하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차’였다는데, ‘땅끝’으로 가고 싶었답니다. 거기 가면 뭔가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땅 끝을 향하던 걸음이 가출이라면, 하늘 끝을 향하는 걸음은 출가입니다. 김성동은 “‘상식’이라고 딱지를 붙여둔 모든 세상에 거슬러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답니다. 깨달음의 바다로 이미 훌쩍 저도 모르게 넘어간 사람들만이 공감하는 세계를 엿보고 싶었답니다. 그곳은 종교도 없고, 석가세존과 예수, 알라도 없이, 사람들의 몸뚱이들이 그대로 와서 “그래 맞다!” 하고 무릎을 치는 곳이라 했습니다. 교리가 다 무엇입니까,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바닥 백성들이 살고 죽는 이야기가 절실한데, 종교들이 한 손으론 하늘을 매만지며, 다른 한 손으론 신도들의 주머니를 훑고 있다면 참 난감한 일이겠지요.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을 빼빼는 없을 테지요. 이제 그 책 이야길 하겠습니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빼빼는 충청남도 보령 땅에 있는 ‘솔미’라는 산골에 살던 여덟 달된 염소입니다. 통통하게 살찌지 못하고 비쩍 말랐다고 해서 엄돌이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말로 나타낼 수도 없게 아름답고 또 슬픈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배가 고파지는 어린 염소입니다. 놀이 땅 밑으로 잦아들고, 기다렸다는 듯이 밤이 몰려오면 쏟아질 듯 하늘에선 별이 쏟아집니다.

그런 밤이면 돌아오지 않는 엄마가 그립고, 몸을 뒤채면서 생각합니다. 아아라히 먼 하늘의 끝에는 무엇이 있으며, 저 산 너머에는 그리고 또 어떤 세상이 있는 것인지. 아아, 나는 왜 염소로 태어났으며, 염소는 어째서 사람들에게 끌려만 다녀야 하는지, 그리고 나를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커다란 힘을 가진 사람들은 어째서 또 이마에 깊은 골을 파면서 한숨 같은 담배연기를 뿜어내야만 하는지.

세상없이 쿨쿨 자고 일어나면 밥그릇부터 뒤지는 돼지는 말합니다. “애태운다는 건 사람들이나 하는 거야. 우리 짐승들은 그저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눈 감으라면 감고, 귀 막으라면 막고, 입 다물라면 다물고, 그렇게 한세상 사는 거야. 그게 편해.”

하지만 빼빼는 이튿날 팔려가고, 기차 안에서 만난 늙은 염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린 사람의 손에 죽는다. 우리네 염소만이 아니다. 소, 돼지, 개, 닭, 토끼, 그리고 나무, 풀, 바람, 흙, 물.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마침내는 사람의 손에 죽게 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몸뚱이를 갈가리 찢을 것이다.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살을, 아기 낳는 여자는 피를, 흉터가 생긴 사람은 뼈를...” 이렇게 끌려 다니다가 죽기는 싫다던 늙은 염소는 급기야 달아나려다 잡혀 모질게 매를 맞았습니다. 그 절망적인 순간에 빼빼는 시퍼런 불덩이가 뚝뚝 떨어지는 늙은 염소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빼빼가 그날 밤 지낸 털보의 집은 굴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에 있었습니다. 빼빼는 처음엔 이곳이 염소나 마소며 돼지를 가둬두는 우릿간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빼빼의 신세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날 물방개처럼 자르르 기름이 흐르고 까마반지르르한 자동차에 나온 검은 안경을 낀 남자와 거래가 이루어질 찰나에 늙은 염소의 마지막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털보가 돈을 받느라고 줄이 조금 느슨해진 순간, 빼빼는 숨을 삼키고 있다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의 물결이 수박 쪽처럼 갈라지고,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땅벌처럼 귀를 물어뜯었습니다. 이내 머리통이 멍해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털보의 손에 다시 끌려가면서 벼락을 맞은 것처럼 뚜렷하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나는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내가 사람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이미 힘없이 끌려만 다니던 어제의 염소가 아니라는 것을.

 

불에 덴 듯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지면서, 졸음이 몰려오면서 빼빼는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어째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리고 소설은 첫장면으로 돌아가 이어집니다, 윤회의 바퀴처럼. 마지막 한 모금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고 난 칼잡이가 손바닥에 침을 뱉었습니다.

“박씨, 소금 준비 됐소?”
“앗따, 장사 첨 하나.”
“잘하쇼, 먼저처럼 실수하지 말고.”
“싸게싸게 하드라고. 애먹으면 노랑내 나니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그러나 빼빼는 살고 싶었습니다. 살아서 이 온 누리의 아름다운 것들을 좀 더 뚜렷하고 튼튼하게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하늘, 별, 바람, 흐르는 물, 나무, 꽃, 풀, 새, 송아지, 토끼, 강아지, 개똥불, 그 모든 것들을.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의 소망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튼튼하게 사랑하는 것이었다면, 사실 사람들의 소망도 거창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소박한 일상을 튼튼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동주가 <별을 헤는 밤>에서 불러보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쟘」 「라이너․마리아․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하지만 세상은 우리들의 소박한 기대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김성동은 1980년 신군부가 자행한 광주학살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1981년에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를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40년 전의 슬픔은 지금도 섬세한 자본주의의 얼굴로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김성동은 그때 소설에 덧붙인 ‘개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소생은 다시 시작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하얗게 밤을 밝히면서 입산(入山) 전날처럼 뼈저리게 번민하다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하는데, 울부짖는 호곡소리 때문입니다. 아아 무간지옥에 떨어져 마땅할 하늘 밑 벌레들의 가증스러운 탐욕 앞에 무참히 죽어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뭇 생명들. 슬픈 눈의 염소며 강아지며 닭이며 토끼, 그리고 아아 관세음보살이여.”

김성동은 소원합니다. 이젠 사납고 억센 글을 써서 나쁜 사람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 마음에 공감합니다.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될까요. 아마도 그리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얼굴을 마주보지 않아도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멀어지면 지척이 천리이듯, 뜻이 통하면 천리가 지척이 되기도 합니다. 시몬 베유는 “진리는 불행한 자들의 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빼빼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빼빼의 마음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문득 온 누리의 아름다운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20년 11-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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