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머뭇거리게 하는 파랑, 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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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머뭇거리게 하는 파랑, 그 하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0.11.10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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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4

며칠 전에 모진 바람이 불더니, 하늘이 파랗다. ‘파랑’이라는 발음이 방금 수면을 얼핏 스치며 다시 차오르는 새의 깃털 모양 가볍고 명징하게 들린다. 잉그리트 리델이 쓴 <색의 신비>라는 책을 보면, 파랑은 ‘천상의 지식을 지닌 진리에 결속된 사람’의 특징을 갖는다고 씌어 있다. 파랑은 성모 마리아의 망토 빛깔이며, 교회는 그분을 ‘바다의 별’로 흠모한다. 창해(蒼海)에 뜬 별빛으로 밤하늘 역시 푸를 것이다.

12세기의 위대한 신비주의자이며 대수도원장이었던 빙엔의 힐데가르트 수녀는 <시비아스>라는 책에서 자신이 본 비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인간 형상을 한 사파이어 색의 아주 밝은 빛을 보았다.” 사파이어의 푸른 빛을 가진 인간 형상은 그녀의 도판(圖板)에서 한가운데 서 있으며, 축복의 손을 내밀며 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로 다가온다고 하였다. 그는 푸른 빛의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형상이 지극히 여성적인 모습이어서, 리델은 그 형상을 힐데가르트 수녀 안에 깃든 그리스도, 사람 안에 깃든 하느님의 모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푸른 빛은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어떤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by Hildegard von Bingen
by Hildegard von Bingen

운문사에서 만난 정적

지날 일요일, 경주박물관대학에서 청도 운문사로 고적 답사를 갔다. 80여 명 가까운 사람들이 2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한 시간 남짓 도로를 달렸을 것이다. 길목에서 운문댐 휴게소에 내렸을 때, 머리가 어지러웠다. 웬일일까 청도로 가는 길은 워낙 구불구불하여 그 버스의 뒤척임에 어지럼증이 생겼던 모양이다. 한숨 돌리고 이윽고 도착한 운문사는 예상과 많이 빗나갔다. 운문사는 이번이 초행길인데, 예전에 책에서 사진을 보고 깊은 산속에 분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은 절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 본 운문사는 평지에 자리 잡은 사찰이었다. 그 넓은 절간에 굴곡이 없다. 경상도 땅에 워낙 산이 많아서 대부분의 유명한 절들은 산기슭을 계단처럼 깎아서 절집을 세웠는데, 그런 점에서 운문사는 느낌이 특별했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여자 스님들이 살고 있는 운문사에 대한 첫인상은 절이라기보다 큰 고택(古宅)의 정원 같았다. 구석구석 여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는 것처럼 단정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답사 도우미가 사전 설명을 해주시는데, 마침 점심공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설명을 뒤로하고 나는 멀끔히 종 치는 비구니만 쳐다 보았다. 종루에 올라가 종을 치는 스님을 먼발치에서 보는 까닭은 그 종소리 때문이었다. 스님은 종을 한 번 치고, 그 여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다음 종을 치는 것이었다. 처음 종소리가 멎고 다음 종소리가 시작될 때까지 그 찰나의 ‘정적(靜寂)’이라니. 결국 나는 그 ‘소리 없음’을 감질나게 갈망하는 것이었다.

운문사는 나처럼 구경 나온 사람들에겐 감질나게 하는 또 다른 구석이 있다. 이곳은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라, 수많은 여자 스님들이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절집의 대부분은 ‘외부인 출입금지’였다. 일반인들이 기웃거릴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꾸 시선이 머무는 곳은 아예 담장을 쌓아서 막아놓은 그들의 영역이었다. 절을 한쪽 끝에서 끝까지 가로지르며 성벽처럼 길게 쌓아놓은 담장은 개울가에서 집어온 납작 돌을 비스듬히, 촘촘히 박아서 만든 것이었다. 열려진 통로 너머로 언뜻언뜻 지나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네들의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이 아득한 거리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었다. 담벼락 한쪽 틈에 지그시 열려진 문이 있기에 보았더니 공양간(供養間)이었고, 그곳에서 비구니 스님 세 분이 어깨에 흰 수건을 얹고 옹당봉당 둘러앉아 음식을 짓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운문사를 막 빠져나오는데 산 쪽으로 붙은 너른 밭에서 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스님들 여럿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추수한 콩대를 긁어모으는 분도 계셨고, 채전(菜田)을 돌보는 분도 계셨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밥 먹고 몸을 부려 일하고 공부하고 참선하고 잠을 청하니, 이네들은 참 좋은 팔자를 타고났거니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젊은 나이에 무슨 마음을 먹고 저리들 머리 깎고 절간에 들어왔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갑자기 많아지는데, 고개를 쳐드니 누르고 푸른 숲 위로 하늘이 높은 ‘파랑’이다. 얼음처럼 쩡하니 푸른빛이다.

그 순간 왜 내가 무주를 떠나 경주로 왔을까, 하는 묵은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산골을 떠나 도시로 왔을까, 생각했다. 당장에 현실적 고민이 앞서 달렸던 것일까?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주변에 산과 숲을 둘러치고 밭둑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긴 호흡 한 번 내리쉬던 그 사람 어디에 갔는지, 도시에선 씀씀이가 많아지고 따라서 많이 벌어야 한다. 그래서 잡된 생각도 많아지고, 때로 나의 본심(本心)은 오리무중 이 된다.

하산(下山)에 관하여 그동안 의미를 많이 붙여두었다. 이젠 사람에게로,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들에게로 가서 바람이 전하는 말을 전해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돌아보면 경주행(行)은 축복 가운데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사심 없이 정을 나누어 준 분들이 있고, 천년의 세월을 넘어서 자취를 남기어 준 유적들이 있고, ‘황금 바다’인 김해(金海)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어차피 살다 보면, 삶은 때로 의미롭고, 때론 무의미한 법이다. 때로 다행스럽고 때론 고통스러울 것이다.
 

사진출처=호거산 운문사 홈페이지 캡처
사진출처=호거산 운문사 홈페이지 캡처

내가 이런 넋두리를 하는 걸 보면, 첫째는 운문사 스님들의 일상에 대한 부러움이 솟았을 터였고, 둘째는 하늘이 너무나 파랗게 비추어서 고단한 요즘 생활이 억울하다 여겨졌을 터였다. 결국 투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니 어린애들처럼 투정 부리지 말고, 고단함도 행복처럼 다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몸을 입은 까닭에 세상은 걸어가야 하고, 공기의 저항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나서야 한다.

사실상 이미 다 알지 않는가 청정무구해 보이는 수행자들의 공간에도 번뇌가 그치지 않고, 거룩한 장막 뒤에도 오욕칠정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모든 그림자들을 모르지 않더라도, 그 그림자들과 함께 싸우며 다독거리며 가야 하는 게 삶이란 것을 가끔 깜빡할 때가 있다. 하늘이 너무나 파란 날에는, 그런 맑은 기운이 한꺼번에 내 속의 그림자를 밀어붙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에는 꼭 그러했다.

겨울이 되면 오리들은

지난 한 달 동안 아침마다 영지초등학교엘 갔다.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같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을 부모들이 한 달씩 돌아가며 자동차로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인데, 11월 한 달은 우리집 차례였다. 자동차의 좁은 공간에서,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아이들은 할 말이 많았다. 보이는 것마다 참견하고 서로 한 마디씩 거드는 데 경쟁을 벌였다. 길목에서 늘 보게 되는 영지(影池)엔 청둥오리가 떼지어 흐르고 있었다.

결이가 한 마디 했다.
“겨울이 되면 얼음이 얼 텐데, 그럼 저 오리들은 어떻게 살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오리들은 못 날잖아?”
“아냐, 집오리는 날지 못하지만, 쟤네들은 청둥오리거든. 청둥오리 는 날 수 있어.”
“아항, 그렇구나.”

오리들의 살 길을 걱정하는 아이들을 학교 운동장에 내려놓으면, 아이들은 걷는 법이 없다. 손을 흔들며 가방을 들썩거리며 유치원으로 뛰어들 간다. 다시 텅 빈 학교 운동장 위에 열린 파란 하늘로 웃자란 나무들이 가지를 흔든다.

내가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든지, 새로운 날은 이미 시작되었다. 다시 경주를 떠나 다른 데로 공간을 옮기게 될 여지는 없다. 나는 또 다른 내담자와 마음속 깊은 데로 여행을 떠날 것이고, 김해에서 학생들과 사람의 마음과 상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대구에서 노동자들을 만나, 그네들의 자녀와 세상에 대하여 말을 듣고 또한 말을 할 것이다. 길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날 것이고, 그 풍경은 새로운 전설을 다시 속삭여 주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늘 새로움’의 상징이듯이, 새로운 것은 지천에 사방에 깔려 다만 내 보는 눈이 새로워지길 갈망할 것이다.

며칠 전에 한현 선생님이 발간하시는 <참사람 되어>에서 대림절 묵상자료가 발송되어 내게로 왔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쓴 것이다. 한때 온통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혁명적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 가도록 부추겼던 <해방신학>이란 책을 통해 처음 만났던 페루의 신학 자다. ‘주님의 공현축일’ 묵상을 읽어 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공현(公顯)이란 드러남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공현은 성탄을 우리끼리만 하는 기념제로 국한시키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역사의 갈림길에 있도록 해준다. 역사의 길을 가는 남녀들에게 공현은 부르심이요, 도전이다. 공현은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밝혀 준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태어났음이 단지 동방박사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두루 알려진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 가족만의 소유가 아니듯이, 한때 어린아이였을 우리 역시 세상을 위해 봉헌된 존재라는 뜻이겠다. 예수가 진리를 위해 당신을 세상에 드러냈다면, 우리 역시 자신을 진리를 위해 공적으로 내어 놓을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새로움은 시작되었다. 그 길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스스로 다독거리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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