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세례가 혁명이었던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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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세례가 혁명이었던 까닭은?
  • 최태선
  • 승인 2020.10.2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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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오늘날 교인들에게 세례는 무엇일까요. 그나마 침례를 받는 모습에서는 진지함이 조금 보이지만 다른 교회들에서 이루어지는 세례는 엉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히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진중세례는 그야말로 세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자기 교회 교인들을 끌어 모으느라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례를 받았든 안 받았든 자기 교회로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만이 번성하고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이것이 성령의 은혜, 혹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 주장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탄의 하수인이 된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세례 특히 유아세례는 교인들을 자신들의 교회에 고착시키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지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세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은 바로 이 세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인생의 변곡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가족들과 날카로운 대립을 경험했다. 가정이 흩어지고 분열되었다. 약혼이 깨어지고, 결혼관계가 무너졌다. 켈수스는 젊은이들과 여인들이 홀로 있을 때 그들에게 진리로 도전하는 직조공, 구두수선공, 무두장이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켈수스에 따르면 이들은 그럴듯한 말로 ‘희생자’를 설득해 부모와 선생을 떠나 자신들의 일터에서 복음을 배울 것을 종용했음, 종종 그 목적을 이루었다.”(<초대교회>, 에버하르트 아놀드 p.31- )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의 상황이 초기교회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졌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서,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아내나 부모의 등쌀에 밀려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 있기는 있습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의 경우엔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정통이 이단이고, 이단이 정통일까요.

이 대답을 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오늘날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런 일을 놓고 이단들이 혹세무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때문에 불화가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시대에 따라 말씀의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교회의 이런 인식이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복음해석일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례의 타락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세례란 이미 언급했듯이 인생의 변곡점이 되어야 합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서 기존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가족들과도 첨예한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분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로 인해 분열이 일어납니다. 가족의 붕괴가 일어납니다. 그만큼 세례란 그리스도인들에게 혁명적인 것이어서 그것을 급진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뇌관을 제거하는 첩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세례는 ‘눈물 한 방울’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순간적으로 흘리는 그 눈물이 세례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례는 인생의 변곡점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일종의 면죄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던 이 용사들은 주로 중하층 계급에 속했다. 그들은 해방된 노예노동자이거나 여전히 집안 혹은 일터에 속박된 노예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 1세기 말 전까지 상류층 사람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합류하는 일은 드물었다. 교회의 괄목할 만한 수적 성장은 2세기 이후에나 일어났으며, 그 전까지 기독교 전파는 주로 노동자 계급에 국한되어 일어났다. 교회가 노동에 두었던 가치는 구성원들의 삶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뿐 아니라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두가 땀 흘려 일해야 했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소유를 나누는, 더불어 사는 삶,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교회는 일자리를 제공해야 했다. 초대교회공동체가 소유와 함께 노동을 얼마나 온전히 공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사람, 기독교를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업처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으른 자는 결코 신자가 될 수 없었다.” (-위의 책, p.32)

이 내용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이든 돈으로 하려 하게 되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고가 지배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기교회는 반대였습니다. 중하층계급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하층계급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노예출신이거나 여전히 노예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노예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미국의 백인 농장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노예들을 학대하고 유린하는 것을 보고 분노합니다. 농장주들은 초야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비인간적인 권리를 은혜로 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교회 시대의 노예도 그런 흑인 노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노예 혹은 노예출신의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켈수스는 그들이 젊은이들과 여인들을 그럴듯한 말로 현혹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은 도저히 살 수 있는 생계수단이 없는 젊은이들과 여인들에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들을 훈련시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초기교회의 상황을 잘 상상해보십시오. 처음 삼사십 년간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는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층계급 사람들이 도저히 살 방법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살 수 있게 된 젊은이들과 여인들이 열심히 일해 다른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은 조금씩 늘어났습니다. 상류계층 사람들이 부를 나누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서로를 도왔고 직업보도까지 하였습니다. 자신의 일자리를 나누어주고, 더 열심히 일해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알고 이해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담겨 있는 폭발력을 터트린 것입니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소유를 나누는, 더불어 사는 삶,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교회는 일자리를 제공해야 했다.”

저는 오늘날 교회들이 초기교회와 같이 이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또 다시 복음을 터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교회에 대해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세례를 받은 사람, 세례가 인생의 변곡점이 된 사람들에게 가능한 복음의 삶입니다. 그런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2세기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도 전해지는 복음을 만들었습니다. 부자들 가운데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고 구걸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혹독한 박해의 시기를 지나 마침내 로마를 굴복시키기에 이른 것입니다.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사람, 기독교를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업처로 생각하는 사람은 교회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으른 자는 결코 신자가 될 수 없었다’”

우리도 이런 교회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공동체가 있었다면 타계하신 이건희님도 다른 삶을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노조 없는 기업이 아니라 행복하게 더불어 사는 복음의 삶을 사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 받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고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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