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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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 헨리 나웬
  • 승인 2020.10.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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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자유의 길] -3

수술이 끝난 후 나는 내가 죽지 않고 곧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풀려난 세상에 다시 돌아왔다는 단순한 사실을 직면해야 했다. 나는 살아서 기뻤지만 더 깊은 속에서는 혼란스러웠고 예수님이 아직도 왜 나를 집으로 부르지 않으셨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렇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 돌아올 수 있어 행복했지만 내가 이 “눈물의 골짜기”에 돌아오는 것이 왜 더 나은 일인지 나 자신에게 물어야 했다. 나의 가족과 공동체와 함께 더 오래 살 수 있어 감사했지만, 이 지구에서 더 오래 산다는 것이 더 많은 투쟁, 고통, 번민 그리고 더 많은 외로움을 의미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나의 중요한 질문은 이렇게 변해갔다: “내가 왜 살아있는가? 왜 나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갈 준비가 안되었는가? 왜 나는 사랑이 너무나 모호하고, 평화를 경험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즐거움은 너무나 깊숙이 슬픔 속에 숨겨져 있는 여기에 다시 돌아가라는 요구를 받았는가?” 질문은 많은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고 천천히 나는 대답들을 정리해야 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깊은 내면에서 나는 죽음이 가장 중요한 살아가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다른 이들을 죄책감으로 묶어 놓든가 아니면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사이의 선택을 의미한다. 이 선택은 생명을 주는 죽음과 죽이는 죽음 사이의 선택이다. 나는 죽은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다는 깊은 자책감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맴도는 죄책감으로부터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죽음은 뒤에 남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내 자신이 죽음과 직접 만나면서 이렇게 성찰할 때에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낯선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함께 살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나 나 자신에게도. 오로지 죽음의 얼굴 앞에서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힐끗- 삶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나는 자아에 죽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그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게 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고 온전히 모든 것을 그분께 맡김으로써 나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더 결실을 맺게 해주리라는 것을 깨닫도록 예수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나의 가장 깊은 소명이 늘 무엇이었는지를 갑자기 알 수 있게 되었다.

죽음과의 만남은 나의 신체적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또한 그것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일생동안의 자아에 대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해주었다.

삶으로의 귀환과 그 많은 투쟁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생각컨대,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도록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지나가는 실제로부터 영원한 실제를 향하여, 인간의 사랑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으로 옮겨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해왔다. 그러나 “다른 편”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새로운 증인으로 초대되고 있는 것 같다: 모호함의 세계 속으로 돌아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자리로부터 말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근본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나의 동료인간존재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말들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 같다.

이제 나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 들려오던 소리를 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 말들은 나와 나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도 들려오는 말이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이라는 진실을, 무조건으로 사랑 받고 있다는 진실을 일단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나는 세상에 보내져서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에게 당면한 가장 큰 영적인 과제는 내가 하느님께 속하고 이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온전히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말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나의 행동이 비판받고 조롱당하거나 무용지물로 여겨질 때조차 자유롭게 행동하며;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자유롭게 받으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모든 현존의 징표를 자유롭게 감사할 정도로.

수술에서 깨어나 내가 하느님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세상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보내졌다는 인식을 즉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랑에 굶주리고 목말라하지만 자주 그런 사랑이 찾아질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것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모두를 포용하는 사랑을 알리도록 보내진 것이다.

이제 나는 “알린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말, 논쟁, 언어 그리고 방법의 문제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 속에 존재하는 방식을 설득시키기보다 보여주려고 더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길이다. 나는 보내졌지만 다른 편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시간 속에서 인간의 추구를 드러내지만 영원을 살아야 한다. 내 자신을 사람들에게 주면서도 하느님께 속해야 하는 것이다.

영원과 만나고 나선, 마치 그것이 이미 이곳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며 영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아버지와의 친밀하고도 깨어질 수 없는 일치로부터 말씀하셨고 그래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셨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요한 3,11). 예수님처럼 되어 내가 본 것을 증언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나는 하느님 안에 살면서 인간의 실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집에 있으면서 지나가 버리는 것의 중요함을 볼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의 집에 머물면서도 사람들의 집에 있을 수 있다. 생명의 빵으로 양육되면서 나는 식량의 부족으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정의활동을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 것이 아닌 평화를 맛보면서 동시에 이 지상에 정의와 평화를 세우려는 인간의 투쟁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안전, 착각적인 선명함, 그렇다. 심지어 절대주의나 교의주의도 있다: 지배하려는 오래된 유혹들이다. 영원으로부터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사리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질문들이 제기되기 전에 이미 답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전체 사명은 “위로부터”의 사명,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나온 사명이었다. 예수님이 물었던 모든 질문들, 주셨던 모든 답들, 그분이 야기시켰던 대립들 그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모든 위로들은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지식에 뿌리를 두었다.

그분의 사명은 억압적이 아니었다. 그 사명은 당신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깊이 경험한 것으로부터 나왔으며, 인정과 받아들임에 대한 개인적인 필요라는 동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아버지께 속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웠다.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제 죽음과의 만남이 나를 세상의 남용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롭게 해줘서 나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위로부터 살 수 있겠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분명하게 기도, 관상, 침묵, 고독 그리고 내적인 이탈로의 초대이다. 나는 속하기 위하여 “속하지 않는 것”을, 위로부터 살기 위하여 아래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계속 선택해야 한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맛은 일상의 중독적인 세력들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할 때 재빨리 사라진다. 명상에서 받았던 삶의 선명한 의미는 일상의 많은 과제들이 돌아오고 삶을 다시 지배하기 시작하면 쉽게 사라져버린다. 예수님의 제자로 남아있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위로부터 계속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훈련이 요구된다. 그러나 병원에서의 체험이 가져온 진실은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뒤에서 빛나고 있는 해를 힐끗 본 것에 불과한 것 같아도 부정할 수 없다. 삶의 모든 구름들은 따스함과 빛을 주고있는 것이 태양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식으로 나를 더 이상 우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유지하려는 매우 단호하고 자기 훈련적인 노력 없이는, 병원에서의 체험이 단순히 신심적인 기억에 불과하도록 변해버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친구들이 내 회복에 관하여 보인 반응들은 우리 사회에서 삶과 죽음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성찰해보게 했다. 이구동성으로 그들은 내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했고 내가 다시 너무나 잘 지내고 있다고 감사를 표현했다. 그들의 관심과 사랑에 나도 깊이 감사했지만 죽음에 가까웠을 때 하느님과 만났던 것은 내가 “다시 좋아진 것”이 참으로 나에게 최상의 일인가를 반문하게 했다.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놓여나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는 집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나는 바오로 사도의 딜레마를 느끼고 있었다 -삶으로 혹은 죽음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릴 것인가- 그 딜레마는 나의 딜레마가 되었다. 이 딜레마 때문에 생기는 긴장과 갈등은 이제 내 삶의 근저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확신이 섰기 때문에 나는 살아 남아서 여전히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주고 기쁨을 더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다시 찾아 가게되면 여러분은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립 1,21-26)

나는 바오로의 이 말들이 계속 끊임없이 나를 인도하기를 기도한다. 나의 죽음이 다른 이들에게 선물일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된 나는 이제 또한 나의 삶이 그만큼의 선물이 되기 위하여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사는 것과 죽는 것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주님이시다. 그분께 모든 영광, 명예 그리고 찬미가 속한다. 아마도 지나가던 중형차의 거울은 이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나를 쳤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체험을 쓴지도 5년이 지났다. 지금 그 체험을 다시 되돌아보면서 나는 다시 일상생활의 복잡함 속에 완전히 빠져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내가 배운 것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가?”

나는 병원에서 주어진 평화와 자유를 많이 잃었다. 나는 그 점이 후회스럽다. 그리고 너무나 슬프다. 다시 한번 나에게는 많은 사람들, 많은 일들, 많은 끌어당김이 있다. 그 많은 것들을 다 하고 전적으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 충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팠던 때처럼 더 이상 내가 중심에 있거나 관심의 초점이 되지도 않는다.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그걸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냥 앉아서 나에게 다시 한번 하느님나라를 향하라고 지적해주는 또 다른 사고를 기다릴 수 없다. 다만 나는 내가 놓여진 세상에 대한 눈을 뜨고 점점 더 내 자신이 되어가야만 한다. 즉 점점 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사고로부터 내가 누구이며 무엇이 되라고 초대받았는가를 다시 깨닫게 되었음을 확신한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며 영성작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사목자> <돌아온 아들> 등을 지었고, 마지막 10년동안 라르쉬 새벽공동체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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