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말고 어른이 필요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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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말고 어른이 필요한 사회
  • 김경집
  • 승인 2020.10.2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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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는 말이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요즘은 갈수록 더 실감한다. 기술과 정보의 속도는 우리의 예측과 준비를 가볍게 뛰어 넘는다.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내가 감당할 속도를 넘기에 처음에는 어찌어찌 따라가려고 애쓰다가 금세 포기한다. 최신 정보와 기술의 유효기간이 3년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니 배우다 지칠 바에야 차라리 적당히 그만 두는 게 낫다고 자위한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조차 변화의 속도를 다 감당하지 못하는데 기성세대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조금씩이라도 변화에 순응하려는 노력까지 거두는 순간 우리는 도태된다. 그런데 스스로 도태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왜 그럴까? 그들에게는 나름의 자산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과 견문이 녹록한 게 아니고 심지어 아직도 그 프레임이 어느 정도는 통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아직도 동 세대인들이 권력과 재력을 쥐고 있고 그들의 방식이 통용되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의 자산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게 바로 꼰대의 방식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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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

어른들은 대개 젊은이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늘 자신이 살아온 그 젊음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헤르더의 말처럼 우리는 누구나 ‘시대의 딸’이니까.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과 방식에 치른 값이 있다. 쉽게 치른 값도 아니다. 억압과 강요 그리고 경쟁의 울타리에 갇혀 양육되어 살면서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악물고 살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부모 세대들이 누리지 못한 풍요와 행복을 누렸다. 아직 노년에 들지 않은, 그러니까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세대들도 그런 세상에서 성장했고 지금 그 결과물들을 아직 손에 쥐고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을 다음 세대들에게 은연중 학습시키고 주입한다. 그걸 교육이라고 착각하면서.

그런 사람들 눈에 지금의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가 눈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걸 고친답시고 간섭하고 혀를 차며 비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순간 꼰대가 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선 꼰대를 ‘늙은이’를 이르는 은어이며, 학생들이 ‘선생님’을 지칭하는 비속적 은어라고 정의한다. 그 공통점은 ‘권위’를 행사하는 어른다. 기성세대 중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짓을 일상화하는 사람이 꼰대다. ‘꼰대’라는 말은 영국의 BBC방송에서도 페이스북 페이지에 ‘오늘의 단어’로 ‘kkondae’를 소개하며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풀이했을 만큼 ‘국제어(?)’가 되었다.

아이를 기르는 아비로서 혹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나는 결코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거야.”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식이나 제자에게 잘되라고 충고하고 훈육하지 않는 어른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의 가치, 나의 바람, 나의 욕구가 투사되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을 들으려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더 많이 해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보다 들으려 한 건 나이 쉰을 넘겼을 때였다. 학생들의 논리가 선생보다 정연하고 지식과 정보의 근거가 튼실하기는 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도 나름의 논리와 근거가 있을 뿐 아니라 내가 바라보지 못한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한 이후였다. 자식들도 커가면서 무조건 순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따지거나 설득하는 일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말하기보다 듣기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듣기를 거부할 때는, 그들이 모두 미숙하고 어리석으며 경험은 얕고 시야는 좁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내가 배우는 게 더 많아지고, 내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며, 사고 판단의 근거가 더 유연해지는 걸 깨달았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공감하는 노력도 조금씩 늘었다. 그 순간 그들을 가르치려 할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선배 세대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존재, 언행, 방식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순간 나의 삶이 바뀌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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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씩 깜짝깜짝 놀란다. 젊었을 때는 그리도 진취적이고 불의에 대해 분노하던 친구들이 보수를 넘어 수구의 진영에서 똬리를 틀고 세상을 재단하는 모습들이 너무 흔하다. 웃기는 건 유튜브의 사용이 마치 지식과 기술의 진화를 대변하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인지부조화를 넘어 확증편향의 단계까지 들어섰으니 백약이 무효다. 시위 한 번이라도 하려면 모질게 각오했어야 하고, 교내에서조차 기껏 몇 십 분쯤 구호 외치는 게 거의 전부였으며, 걸리면 강제 징집되거나 제적당하는 건 예사였던 시절 그리도 분노하던 친구들이 지금의 정부는 친북 용공 좌파 정부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 나라를 송두리째 북한에 바칠 것이란다. 이미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방식이 시행되고 있는 데, 바로 학교 무료급식이 그것이란다. 배급제를 실시하는 걸 왜 사람들이 모르는지 개탄스럽단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웃 종교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친구들 가운데 장로들도 많다. 그럴 나이와 지위(?) 그리고 독실한 신앙과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장로가 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모범적 신사인 장로 친구들도 있고 극성스러운 장로 친구들도 있다. 그래도 모이면 서로 장로끼리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문제는 극성스러운 장로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주일에는 반드시 ‘자기 교회’에서 예배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벌레 대하듯 한다. 그러니 모두들 그 친구 옆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일상의 삶과 사회적 사업이 모범적이거나 존경을 받을 수준이 아니다. 돈이라면 거의 환장하는 수준이고 온갖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언젠가 한 친구가 그걸 지적했더니 자기가 돈 버는 건 오로지 십일조 많이 바치기 위해서라며 흥분해서 우리 모두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법조계에서 높은 자리 역임하고 변호사로 엄청난 돈을 번 친구는 자기 의뢰인들의 면면을 자랑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며, 그들의 고충을 대변하는 일에 바쁘다. 돈 많은 자기 의뢰인을 괴롭히는 건 우리 사회가 삐뚤어진 방향으로 가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너무 터무니없는 요구하는 건 정부가 물러 터졌기 때문이란다.

다행히 그런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미안해하고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쫒기보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양보할 수 있고 무엇을 마련할 수 있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다. 30년 넘게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하여 늘 경제적으로 궁핍한 변호사 친구도 있다. 그래도 친구들끼리니 불편해도 어느 정도 용납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이라면 벌써 둘로 갈라져 경멸했을 것이다.

얼마 전 모였을 때 한 친구가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금세 여러 친구들이 동감을 표했다. 그들이 말하는 ‘어른’은 도대체 누구일까? 모두에게 존경받고 모범적이며 어느 정도 이타적 삶을 살고 때로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그러면서 높은 지위에 있는(혹은 있던) 사람? 아마 그런 원로를 의미하는 듯하다. 갈등과 분쟁 그리고 갈팡질팡 상황에서 조정해 주고 도닥이며 방향을 설정해 줄 수 있는 해결사를 원하는 것이리라. 그런 원로가 없는 건 안타깝기는 하다. 하지만 왜 ‘있지도 않을’ 그런 원로에 의지하려는 것일까?

나도 한 마디 끼어들었다. “왜 멀리에서 찾아? 우리는 제대로 된 어른인지 먼저 물어야 하고 그런 어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나’는 쏙 빠지고 남에게 떠밀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되지도 않은 말 시시콜콜 간섭하고 야단치려는 꼰대 근성부터 버려야 해. 쉽지는 않겠지. 그런 어른들 밑에서 우리가 살았으니 우리도 그 나이에 똑같은 짓 하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부터 바꿔야지. 교회나 성당에도 어른들 특히 장로나 분과위원장 꿰차고 있는 늙은 것들이 애들만 보면 잔소리하는 버릇부터 버려. 요즘은 군대에서도 고참이라고 꼬장 부리지 못해. 그거 바뀌는 데 걸린 시간 생각해보라고. 나부터, 우리부터 바뀌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나도 그리 살지 못하면서 주제넘은 말인 걸 안다. 위선일 수 있다. 그래도 그렇게 살려고 애써야 한다. 적어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른들이 제대로 어른 역할 하면 된다. 대단한 거 바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

교회에서 성직자들은 일종의 어른이다. 교회 내에서 권위와 역할 때문에 존중받는다. 그러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경우가 심심치 않다. 그렇게 교회에서 꼰대가 된다. 권력과 빵부스러기나 기웃거리지 말고 힘든 청년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약자들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며 그들의 편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할 때 교회가 건강해지고 사회도 건전해진다.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지 않고 엄한 짓들 일삼으니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게 된 세상이다. 나이 든 모든 사람들이 반성할 일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신명 10,19)

올챙이 시절 기억하는 개구리만 될 수 있어도 절반쯤은 어른 노릇하며 살 수 있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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